EPISODE 10

남을 이유와 떠날 이유

지산맨션에는 빈방이 없다

검은 장부의 잉크가 마르기 전에 주민들은 지하 창고에서 옮겨 온 기록을 관리실 바닥에 펼쳤다. 파란 장부는 관리비와 공용 전기료, 노란 장부는 수리비와 선지출, 붉은 장부는 열쇠와 출입 시간, 검은 장부는 이름이 지워진 사람들의 기록이었다.

재호는 장갑을 끼고 페이지를 넘겼다. 지하 창고의 습기 때문에 종이 가장자리가 눅눅했지만, 글씨는 대부분 남아 있었다. 첫 장에는 소유권 이전 전 주민 확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2019년 8월 29일. 302호 임시 사용자는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다. 안전과 거주권을 분리한다. 보호자는 서해인. 관리 후보는 한재호.

재호는 그 문장을 오래 읽었다.

“2019년에 저는 서울에 있었던 것 같아요.”

해인이 말했다.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어요.”

“그럼 기억과 기록 중 하나는 확인해야 합니다.”

“기록도 누군가 만들었으니까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요.”

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기록을 믿을지 기억을 믿을지 결정하지 않고, 서로의 출처를 따로 확인하기로 했다.

매수자 대리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전 점검 보류와 주민협약, 미확인 사용 흔적 때문에 평가액이 40퍼센트 낮아졌다는 통보였다. 계약금 집행도 중단되었다. 주민들은 안도와 불안을 함께 느꼈다. 매각이 멈췄지만, 건물에 들어올 예정이던 돈도 멈췄다.

장미경이 공동기금 잔액을 확인했다.

“11만 원입니다.”

“법률 상담 한 번이면 거의 다 나가겠네요.” 도윤이 말했다.

“그래도 어디에 썼는지는 모두 알잖아요.” 미경은 영수증 묶음을 들었다. “나는 그게 중요해요. 돈이 적은 것보다 돈이 사라진 이유를 모르는 게 더 무섭거든요.”

주민들은 협약의 마지막 조항을 정리했다. 302호를 실제 사용자 동의 없이 임대하거나 봉인하지 않는다. 안전 위험은 즉시 수리한다. 외부 점검은 주민 입회와 공개 기록을 전제로 한다. 안전과 거주권을 분리한다. 확인되지 않은 계약서는 결론내리지 않는다. 관리인은 두 명 이상의 주민 서명을 받는다. 공동기금은 수리, 안전, 법률 상담 순서로 사용한다.

미경은 여덟 번째 조항을 다시 꺼냈다.

“회의 간식도 기록해요. 누가 사고, 무엇을 샀고, 얼마가 남았는지.”

도윤이 조항을 읽었다.

“사소해 보여도 비용은 비용입니다.”

재호는 주민협약의 마지막 줄에 그 문장을 넣었다. 모든 주민이 한 명씩 서명했다. 처음 302호 문 앞 장부의 빈 줄에 재호와 해인 둘만 이름을 적었던 날과 달리, 이번에는 관리실 책상이 서명으로 가득 찼다.

해인은 서명한 종이 옆에 가족에게 보낼 요청서를 놓았다. 주민 동의 없는 매각과 302호 봉인에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재호는 서울 재지원 안내서를 주민들 앞에 펼쳤다.

“다음 달에 다시 지원할 수 있습니다. 합격하면 떠날 수 있어요. 이번에는 면접을 놓친 일을 해인 씨나 주민들 탓으로 돌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선택한 비용입니다.”

해인은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재호 씨가 남는 이유가 제가 되면 안 돼요.”

“해인 씨는 남을 겁니까?”

“외삼촌에게서 권한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주민 동의 없이 매각하는 데는 반대할 거예요.”

“그럼 우리 둘 다 떠날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죠.”

해인은 재호에게 남아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재호도 해인에게 가족과 싸우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선택을 대신하지 않는 방식으로 같은 협약에 서명했다.

저녁 무렵 302호 우편함 안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주민들이 모여 문을 확인했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편함 안에는 소유자라고 적힌 열쇠와 짧은 편지가 있었다.

302호 사용자는 방 안에 살지 않는다. 다음 소유자를 정하기 전에 그의 이름을 확인하라.

해인은 편지를 장부에 붙였다. 재호는 열쇠를 들어 올리지 않고 손전등으로 홈과 긁힌 자국을 확인했다.

“누가 오래 쓴 열쇠입니다.”

“소유자 열쇠인지, 소유자를 찾는 열쇠인지는 아직 모르죠.”

그때 현관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람이 3층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옷은 오래된 세탁소 앞치마처럼 보였고, 한쪽 신발 뒤꿈치가 유난히 닳아 있었다. 302호 앞에 다다른 남자는 주민들을 보고도 돌아서지 않았다.

재호는 출입표를 펼쳤다.

“이름을 적어 주세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우편함 속 열쇠를 바라보았다.

해인이 물었다.

“302호를 아십니까?”

“방으로는 모릅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2019년 녹음 속 목소리와 겹쳤다. 재호의 손가락이 출입표 위에서 굳었다.

“누구십니까?”

남자는 재호를 바라보았다.

“한재호 씨. 늦었네요.”

“당신이 그 목소리입니까?”

“그 목소리가 누구인지 기억하십니까?”

재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해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름을 말해 줄 수 있어요?”

남자는 302호 계약서 사본을 요구했다. 재호는 주민들 앞에서 봉인해 둔 사본을 꺼냈다. 남자는 서명란 아래 도려낸 이름의 윤곽을 손끝으로 만졌다.

“이건 제 이름이었어요.”

“확인할 수 있는 신분증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보여 줄 수 없어요.”

도윤이 호루라기를 손에 쥐었다. 수완은 녹음기를 켰다. 미경은 남자의 신발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물결세탁소에서 돈을 받은 적 있습니까?”

남자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돈은 여러 번 받았지만, 제 몫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누구 몫이었어요?”

“방을 비워 두는 대가였습니다.”

해인의 얼굴이 굳었다. 남자는 재호를 향해 말했다.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죠. 2019년에 이 방에서 나를 내보내겠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어요.”

재호는 숨을 들이켰다.

“제가요?”

“당신은 곧 관리인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이름을 장부에 올리면 아무도 나를 내보내지 못한다고도 했고요. 그런데 다음 날 장부에서 내 이름이 지워졌습니다.”

해인이 낮게 물었다.

“누가 지웠습니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소유자라고 적힌 열쇠를 우편함 안에 넣었다.

“이건 당신들에게 돌려주는 열쇠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에게 주는 겁니까?” 재호가 물었다.

“다음 소유자를 확인한 뒤에야 알 수 있습니다.”

남자는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재호가 뒤따르려 하자 해인이 그의 팔을 잡았다.

“혼자 쫓아가지 마요.”

재호는 걸음을 멈췄다. 남자는 2층 계단 모서리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

“9월 1일 옥상으로 오세요. 그때 제 이름과 두 번째 계약서를 같이 확인하겠습니다.”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주민들은 잠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수완의 녹음기에는 남자의 목소리와 약속이 모두 남아 있었다.

관리실로 돌아온 재호는 장부 마지막 줄에 적었다.

1차 주민협약 확정. 매각 보류. 실제 사용자 등장. 이름과 계약서 진위는 미확인.

해인은 옥상 주소와 소유자 열쇠의 사진을 장부에 붙였다. 재호는 서울행 기차 시간표를 확인했다. 9월 1일 저녁과 재지원 면접 준비 일정이 겹쳐 있었다. 해인은 화면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이 확인하자는 말은 할 수 있어요.” 재호가 말했다.

“하지만 남으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저도 해인 씨가 가족 편에 서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둘은 관리실 책상 양쪽에 앉았다. 창밖으로 수성못의 오리배 불빛이 보였고, 복도등은 1층부터 차례로 켜졌다. 3층 전등은 마지막까지 어두웠지만, 잠시 뒤 희미하게 불이 들어왔다.

302호 안쪽에서 종료음이 울렸다. 전원은 분리되어 있었고 세탁기는 작동하지 않았다. 주민들이 문을 열었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탁기 위에 작은 종이만 놓여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먼저 확인하세요.

재호는 종이를 집어 들고 주민 장부에 붙였다. 해인은 옆에 의자를 하나 놓았다. 둘은 손을 잡지 않고 공동 장부를 펼쳤다.

장부의 빈 줄 아래에는 오래된 문장이 남아 있었다.

문제는 채택되는 순간 관계가 된다.

재호는 그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대신 아래에 새 문장을 적었다.

확인되지 않은 사람도 기록에서 지우지 않는다.

관리실 컴퓨터에 해인의 매각 반대 요청서가 열려 있었고, 그 옆에는 재호의 서울 재지원 일정표가 놓여 있었다. 주민협약은 확정되었지만 소유권과 실제 사용자의 이름, 두 번째 계약서의 진위, 2019년의 기억은 아직 남아 있었다.

해인은 열쇠를 장부 옆에 놓았다.

“9월 1일, 옥상에서 확인해요.”

재호가 열쇠의 닳은 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번에는 문을 열기 전에 이름부터 묻겠습니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한 번 더 났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302호 우편함 안에서 소유자 열쇠가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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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 시각: 2026-08-20T09:23:20+09:00

MOBOT 세계관 변환 근거

- 기대가 식으며 투자 가치가 조정된 사건: 주민협약과 두 사람의 선택을 시험하는 마지막 행동에 사용했다. - 확정하지 못한 자료를 결론내리지 않고 보류한 작업 흔적: 부분 결산 뒤 새 열쇠와 질문을 남기는 결말에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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