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6
빈 칸에 이름을 쓰는 법
지산맨션에는 빈방이 없다
문자가 온 뒤에도 재호의 휴대전화는 관리실 탁자 위에 엎어져 있었다. 해인이 답장을 쓰지 말라고 한 지 열세 시간째였다. 박성문이 보낸 문장은 밤새 종이처럼 굳어 있었다. 원본 대장은 회사 보관실 자료입니다. 주민 장부에 일부 내용을 공개한 것은 무단 열람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아침 여덟 시 십오 분, 관리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세 번은 예의였고 네 번째부터는 점검이었다.
재호가 문을 열자 회색 재킷 여자가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뒤에는 어제 보지 못한 남자가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서림주거관리 자료보안 담당입니다. 원본 회수 확인서에 서명해 주세요.”
“원본은 박성문 팀장님이 가져가셨다고 했는데요.”
“회수 대상은 원본 대장과 주민이 촬영한 사본, 그리고 장부에 적힌 전사본입니다.”
수완이 팩스 옆에서 고개를 들었다.
“주민 장부도 회수합니까?”
남자가 태블릿 화면을 켰다.
“무단 열람으로 생성된 2차 자료의 확산을 막는 조치입니다.”
미경이 영수증을 들고 와 화면 아래에 붙였다.
“그럼 이 영수증도 회수하세요. 복사비를 누가 냈는지 확산되면 곤란하실 테니까.”
도윤이 호루라기를 만졌지만 불지는 않았다. 관리실은 아직 경기장이 아니었고, 경기가 아니어도 규칙은 필요했다.
해인이 재호 앞으로 한 장의 종이를 밀었다. 제목은 ‘확인 순서’였다. 첫째, 원본 회수 요구의 발신자와 대상. 둘째, 실증구역 후보 지정의 근거와 승인 단계. 셋째, 주민 동의가 필요한 행위의 범위. 넷째, 실제 302호 출입과 R-2 열쇠 사용의 증거.
“이 순서로 대조하겠습니다.” 해인이 말했다. “회수 확인서에는 서명하지 않아요. 무엇을 회수하는지 먼저 특정해 주세요.”
자료보안 담당자가 웃지 않고 물었다.
“주민대표가 회사 문서의 보관과 공개를 결정합니까?”
“아니요. 주민 장부에 무엇을 확인했는지 기록할 뿐입니다.”
“그 기록 자체가 회사 자료를 복제한 것입니다.”
“그럼 회사가 원본을 언제 누구에게 넘겼는지도 회사 자료로 복제하지 말라고 하셨어야죠.”
말이 잠깐 멈췄다. 복사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전날의 전송 기록을 토해 냈다.
박성문이 들어온 것은 여덟 시 사십 분이었다. 이번에는 명함 대신 검은 파일과 주차장 도면을 들고 있었다. 도면에는 각 동의 주차면이 번호로 나뉘어 있었고, 관리실 앞에는 붉은 원이 그려져 있었다.
“오늘부터 실증구역 사전 자료 수집을 시작합니다.”
해인이 도면을 뒤집었다.
“후보 지정 근거부터 주세요.”
박성문은 얇은 공문을 꺼냈다. 지산맨션을 생활안전 실증구역 후보로 검토한다는 문장이 있었지만, 시행일과 승인기관의 직인은 비어 있었다.
수완이 빈칸을 손톱으로 눌렀다.
“이건 통지서가 아니라 검토 메모예요.”
“행정 절차는 진행 중입니다.”
“진행 중인 절차가 끝난 사람처럼 주차면을 세면 안 됩니다.”
박성문은 태블릿을 켰다. 차량 번호, 입출차 시각, 주차 위치, 302호와 가까운 동선. 주민 얼굴은 촬영하지 않겠지만 차량과 현관의 움직임은 데이터로 필요하다고 했다.
재호는 화면의 작은 지도에서 자신이 매일 지나던 길이 선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선은 사람보다 오래 남고, 사람은 선이 무엇을 위해 그어졌는지 나중에야 알게 된다.
“주민 동의서에는 302호 우선 조사와 열쇠 접근만 있었죠.” 재호가 말했다. “주차장 전체 자료 수집은 별도입니다.”
“안전 실증은 전체 동선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필요하다는 말은 권한이 아니라 요청 사유입니다.”
박성문이 그를 보았다.
“서울 회사에서는 현장 자료를 요구하지 않습니까?”
그 질문은 도면보다 정확히 재호를 겨눴다.
“요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요구를 거부하네요.”
“거부하는 게 아니라 자료마다 주인이 다르다는 겁니다.”
해인이 그 문장을 장부에 받아 적었다. 재호는 문장 아래에 날짜와 자신의 이름을 썼다. 그는 서울 회사가 오늘 오전 보낸 메시지도 함께 기록했다. 검수 대기 업무를 위해 현장 위험 요약과 자료 목록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었다.
수완이 낮게 말했다.
“목록도 자료입니까?”
“목록에는 무엇을 안 보냈는지가 들어갑니다.” 재호가 대답했다.
그는 회사 담당자에게 답장을 보냈다. 지산맨션 관련 원자료·주민 장부·열쇠 기록은 독립 보관 중이며, 현장 당사자와 주민 절차 확인 전에는 목록을 포함해 제공하지 않는다. 검수 업무에는 무관한 자료 요구로 기록하겠다.
전송을 누르자 서울에서 바로 전화가 왔다.
“재호 씨, 문서 검수 대기는 회사 업무입니다. 자료 협조가 어렵다면 계약 범위를 다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계약 범위를 다시 보자는 말씀이 재협의일의 의미라면, 그렇게 기록하겠습니다.”
“개인 사건과 회사 업무를 분리하세요.”
“그래서 분리하고 있습니다. 회사가 요구한 자료와 주민이 보관하는 자료가 같지 않다는 방식으로요.”
전화가 끊겼다. 재호는 배터리 잔량을 보았다. 서른한 퍼센트였다. 사람은 회사와 싸울 때도 충전기를 챙겨야 했다.
아홉 시 반, 최경태가 작업 배정표를 들고 왔다. 이름은 여전히 지워져 있었고, 그 아래에 ‘실증구역 사전 수집 협조자’라는 새 칸이 생겨 있었다.
“이 칸에 서명하면 배정 복귀랍니다.”
“무슨 일을 하게 됩니까?” 해인이 물었다.
“차량 위치 확인, 현관 앞 사진, 열쇠 보관함 점검. 다만 주민 동의서는 아직 없고요.”
미경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복귀 수당은요?”
“기본 일당에서 사전 협조비를 뺀답니다.”
“협조해서 덜 받는 건 처음 보네요.”
최경태는 웃지 않았다.
“배정에서 빠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할 사람도 많습니다.”
그 말이 관리실 안의 공기를 바꿨다. 박성문은 기술과 사업을 말했지만, 최경태는 오늘 점심값과 다음 주 월세를 말하고 있었다.
재호는 배정표를 보며 물었다.
“서명하면 책임자는 최 기사님입니까?”
“현장 협조자라고만 돼 있습니다.”
“그럼 사고가 나면요?”
최경태가 종이를 접었다.
“그때는 제가 현장에 있었으니까 제가 됩니다.”
도윤이 이번에는 호루라기를 입에 가져갔다가 다시 내렸다.
해인이 박성문을 보았다.
“열쇠 접근, 차량 기록, 촬영, 작업자 책임. 네 가지를 한 칸에 넣었습니다. 오늘은 그 칸을 비워 두죠.”
박성문이 낮게 말했다.
“동의하지 않으면 사업은 다른 맨션으로 갑니다.”
“가세요.”
해인의 대답은 빨랐다. 재호는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해인은 곧바로 덧붙였다.
“다만 떠날 때 주민이 거부했다고 쓰지 말고, 승인 근거와 동의 범위를 제출하지 못해 수집을 시작하지 못했다고 쓰세요.”
박성문은 처음으로 표정을 바꿨다. 거절은 사업자에게 익숙하지만, 거절의 사유를 문장으로 고정하는 주민은 덜 익숙한 모양이었다.
오전 열한 시, 법률구조 상담소와 영상통화를 연결했다. 상담소 직원은 원본 회수 요구서의 대상이 불명확하고, 무단 열람 주장은 열람 범위와 공개 범위를 구분해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주민 장부에는 원본 전체의 이미지가 아니라 확인한 항목과 이동 경로만 남아 있었다. 실증구역 공문에는 검토 문구만 있고 시행일·승인기관 직인이 없었다.
“그럼 오늘 확인할 수 있는 건 뭡니까?” 재호가 물었다.
“회수 요구가 있었다는 사실, 주민이 원본을 보관하지 않았다는 사실, 열람한 항목의 범위, 그리고 사업이 아직 후보 검토 단계라는 사실입니다.”
“실제 열쇠 사용은요?”
“그 자료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수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빈칸이 네 개네요.”
“빈칸은 증거가 아닙니다.” 상담소 직원이 말했다. “다만 누가 나중에 무엇을 채우려 했는지는 기록할 수 있습니다.”
점심 무렵, 주민들은 네 묶음의 서류를 게시판에 붙였다. 회수 요구, 사업 근거, 동의 범위, 열쇠 사용. 최경태는 배정 제외 통지와 사전 협조자 서명란을 다섯 번째 묶음으로 붙였다.
미경이 그 옆에 작은 종이를 붙였다.
‘협조비가 일당보다 적으면 협조가 아니라 할인입니다.’
도윤이 마침내 호루라기를 불었다. 짧고 맥 빠진 소리였다.
“왜 지금 불어요?” 재호가 물었다.
“경기 종료가 아니라 자료 묶음 시작 신호입니다.”
오후 두 시, 박성문은 돌아가면서 주차장 입구에 작은 안내판을 세웠다. 주민 협조 시 차량 흐름 안전 분석을 시작한다는 문구 아래, 연락처와 QR코드가 붙었다. 동의서가 없어도 자발적 참여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 작게 달려 있었다.
해인이 안내판을 뽑아 들었다.
“이건 누가 세웁니까?”
“후보구역 관리 주체입니다.”
“관리 주체의 승인 문서가 없잖아요.”
“이미 설치됐습니다.”
재호는 안내판 뒷면을 보았다. 고정 나사 중 하나가 주민 게시판의 나사와 같은 규격이었다. 누군가는 사업이 확정되기 전에 물리적 흔적부터 남기고 있었다.
그는 안내판을 부수지 않았다. 대신 주민 장부에 설치 시각, 위치, 문구, 승인 문서 부재를 적고, 관리실 보관함에 넣었다. 해인은 그 옆에 주민 협약의 제한 문장을 붙였다. 자발적 참여라는 표현으로 전체 주민의 동의를 추정하지 않는다.
박성문에게서 마지막 통지가 왔다. 오늘 수집이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내일 오전 7시부터 주차장 입출차 흐름만 우선 측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는 재호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해인이 그를 막지 않았다.
“내일 오전 7시, 주민 입회 없는 측정을 시작하지 말 것. 측정 장비의 위치·수집 항목·보관 기간·삭제 책임자를 제출할 것. 제출 전 설치하면 주민 협약 위반으로 기록하겠습니다.”
그는 답장을 보냈다. 발신자는 한재호 개인이 아니라 주민협약 관리실이었다.
잠시 뒤 박성문이 전화를 걸었다.
“당신이 이제 주민협약입니까?”
“아닙니다. 주민협약이 누가 문장을 보냈는지 알고 있게 하는 사람입니다.”
“내일 측정은 진행합니다.”
“그럼 내일은 장비보다 먼저 측정 권한을 확인하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저녁이 되자 복도등이 아래층부터 하나씩 켜졌다. 이번에는 떠날 층을 세는 빛이 아니었다. 누가 먼저 주차장에 들어오는지, 누가 먼저 선을 긋는지 확인하는 빛이었다.
최경태는 배정표를 다시 접어 장부 옆에 놓았다.
“저는 사전 협조자 칸에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내일 현장에 나와서 장비가 어디에 놓이는지는 보겠습니다.”
“그럼 배정 복귀는 더 늦어집니다.” 재호가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이번엔 제가 뭘 했는지 회사가 먼저 적게 두진 않겠습니다.”
재호는 그 말을 듣고 서울 계약서의 마지막 줄을 떠올렸다. 재협의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문장. 그는 노트북을 열어 그 문장을 지운 것이 아니라, 회사 담당자에게 수정 요청으로 보냈다. 현장 자료 독립 보관과 재협의일을 계약 본문에 명시하지 않으면 서명을 유지할 수 없다고.
해인이 물었다.
“서울까지 잃을 수도 있어요.”
“네.”
“이번엔 제가 대신 말하지 않을게요.”
“그래서 제가 말하는 겁니다.”
그는 공동 장부 마지막 줄에 적었다. 9월 6일, 원본 회수 요구와 무단 열람 주장은 열람 범위와 공개 범위를 분리해 확인함. 실증구역 후보 공문은 승인 직인이 없어 출입·주차 측정 권한을 발생시키지 않음. 주민협약은 내일 오전 7시 측정 장비의 설치·수집 항목·보관 기간을 확인하기 전까지 주차장 자료 수집을 승인하지 않음.
그리고 그 아래, 최경태의 이름 옆에 새 줄을 만들었다.
사전 협조자 서명은 하지 않으나 현장 측정 절차를 입회하여 기록함.
밤 아홉 시가 지나자 관리실 팩스가 다시 울렸다. 서울 회사의 수정 계약서는 오지 않았다. 대신 서림주거관리에서 주차장 측정 장비 세 대의 설치 위치를 알리는 도면이 도착했다. 도면의 붉은 원은 302호 창문이 아니라 차량 출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재호는 도면을 들고 골목으로 나갔다. 어둠 속 주차면은 낮보다 넓어 보였다. 빈 칸 하나가 사람 한 명의 생활을 숨길 만큼 넓었다.
내일 아침, 그 빈 칸에 장비가 놓이기 전에 누군가는 측정의 이름을 확인해야 했다. 이번에는 원본을 누가 들고 갔는지가 아니라, 아직 아무도 동의하지 않은 움직임을 누가 먼저 숫자로 만들 것인지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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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 시각: 2026-08-21T09:42:47+09:00
MOBOT 세계관 변환 근거
- 아파트 주차장에 로봇을 투입해 데이터를 모으려는 실증 계획: 이번 회차에서 외부 업체가 원본 회수와 함께 주차·출입 기록 수집을 정당화하는 핵심 압력으로 사용했다. - 대형 설비 사업이 별도 법인과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계획: 박성문의 ‘예정’ 주장을 주민들이 승인 문서와 대조하는 장면에 사용했다. - 자동화 확대에 맞서 노동자 보호와 노사정 협의를 요구한 현장: 사업의 속도가 현장 작업자의 배정과 생활비를 깎는다는 비용 구조를 드러내는 데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