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6

서명란의 네 방향

지산맨션에는 빈방이 없다

9월 21일 오전 8시 58분, 관리실 팩스에서 종이가 세 장 연달아 나왔다. 어제 오전 10시 30분에 보낸 공동 회신 요구의 답변이었다. 해인은 마지막 장이 나올 때까지 팩스 옆에 손을 대지 않았다. 종이는 기계보다 빨리 뜨거워졌다.

재호가 시계를 보았다. 답변 기한은 오전 9시였다. 정확히 2분 전이었다.

“세 회사가 약속을 지켰네요.” 미경이 말했다.

“세 회사가 같은 약속을 지켰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재호가 종이를 뒤집었다.

첫 번째 문서의 머리말에는 지역 생활안전 실증 협력망이 적혀 있었다. 접근 로그의 보관 책임자는 협력망 운영 주체이며, 30일 보관은 현장 검수의 표준 절차라는 내용이었다. 맨 아래 서명란에는 운영지원팀장 직인이 찍혀 있었지만 사람 이름은 없었다.

두 번째 문서는 서림주거관리 지역사업팀 명의였다. 현장 준비 완료 판정은 공급업체가 전송한 배송 상태를 자동 반영한 것이고, 비용 코드는 실증 협력망의 집행 예산으로 처리된다고 했다. 책임자는 협력망 운영지원팀이라고 적혀 있었다.

세 번째 문서는 청명보안에서 왔다. 접근 로그는 청명보안의 장비가 아니라 협력망의 별도 운영 시스템에 저장되므로 삭제 책임은 없다고 했다. 현장 준비 완료 건은 서림주거관리에서 전달한 설치 요청을 기준으로 생성되었고, 비용 지급 회사는 서림주거관리라고 적혀 있었다.

해인은 세 장을 나란히 놓았다.

“협력망은 서림주거관리가 보냈다고 하고, 서림주거관리는 공급업체가 보냈다고 하고, 청명보안은 서림주거관리가 돈을 낸다고 하네요.”

미경이 계산기를 켰다.

“그럼 돈은 세 번 이동하나요?”

“돈은 한 번도 이동하지 않을 수 있어요.” 수완이 말했다.

그때 관리실 문이 열렸다. 박성문이 종이컵 네 개를 들고 들어왔다. 컵에는 협력망 로고가 붙어 있었다. 그는 한 개를 재호 앞에 놓다가, 재호의 표정을 보고 다시 거두었다.

“답변은 보셨습니까?”

“네.”

“그럼 현장 준비 완료 건은 공급업체의 자동 상태값이 원인이라는 걸 확인하셨겠네요.”

“자동 상태값을 현장 판정이라고 부른 사람은 누구죠?”

박성문은 종이컵 뚜껑을 눌렀다.

“시스템상 그렇게 집계됩니다.”

“시스템은 사람 이름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그 숫자는 비용 청구를 위한 확정액이 아닙니다. 단순 준비 지표예요.”

해인이 두 번째 문서를 들어 보였다.

“그럼 왜 현장 준비 완료라고 주민 공간의 이름을 붙였죠?”

박성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종이컵의 김이 로고를 흐렸다. 로고도 책임자도 물에 닿으면 번지는 모양이었다.

오전 9시 12분, 한미수가 도착했다. 그녀는 문 앞에서부터 말했다.

“청명보안은 접근 로그를 보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삭제를 요구하는 건 대상이 맞지 않습니다.”

“비용은요?” 해인이 물었다.

“이번 건은 신규 장비 설치가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청구 대상이 아닙니다.”

“그럼 설치 대기와 현장 준비 완료를 누가 유료 업무로 바꿨습니까?”

한미수는 박성문을 바라보았다. 박성문은 창밖을 보았다. 지산맨션 주차장에는 어제 돌아간 공구 상자가 없었다. 없어진 물건을 두고 세 사람의 시선이 늦게 모였다.

재호는 세 문서의 해당 문장에 빨간 펜으로 번호를 붙였다.

첫째, 접근 로그 보관 책임자. 둘째, 현장 준비 완료 판정자. 셋째, 비용 지급 회사. 넷째, 집계에 사용된 주민 공간의 명칭.

“네 항목이 모두 다릅니다.”

박성문이 말했다.

“그래도 설치는 하지 않았고, 개인정보도 수집되지 않았습니다. 실질적인 피해는 없습니다.”

최경태가 문밖에서 웃었다. 그는 낡은 작업복 차림으로 서류봉투를 들고 있었다.

“피해가 없으면 제 이름으로 확인 요청을 만들어도 됩니까?”

박성문이 돌아섰다.

최경태는 봉투에서 휴대전화 화면을 출력한 종이를 꺼냈다. 지난주 작업 앱의 이력에는 현장 확인자 최경태, 상태 준비 완료, 비용 지급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확인 방식 자동 생성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제가 확인한 적 없는 걸 확인했다고 쓰면, 업체에서 대기비를 준대요. 대신 다음 배정은 끊길 겁니다.”

미경이 계산기를 내려놓았다.

“대기비가 얼마예요?”

“6만 원이요.”

“지난번보다 줄었네요.”

“이번에는 일을 안 했으니까요.”

“일을 안 했는데 이름은 했네요.”

최경태는 휴대전화 화면을 껐다.

“이름만 하면 다음엔 일이 없어도 일이 됩니다.”

회의실로 쓰는 1층 휴게 공간에는 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도윤은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들어와 네 개의 의자를 한 줄로 세웠다.

“오늘은 누구 편 작전입니까?”

“편이 아니라 문장 편입니다.” 재호가 말했다.

“문장은 공을 안 차는데요.”

“그래서 자꾸 다른 사람이 찹니다.”

건조한 웃음이 한 번 지나갔다. 박성문은 웃지 않았다.

그는 새 성과표를 펼쳤다. 표의 맨 위에는 이번 분기 현장 준비 완료 1837건이라는 숫자가 굵게 적혀 있었다. 그 아래 후보 현장 목록에 지산맨션이 있었다. 설치 여부 칸은 준비 완료, 책임자 칸은 운영 주체, 비용 칸은 집행 예정으로 되어 있었다.

해인이 성과표를 당겨 왔다.

“이 숫자에서 우리 이름을 빼세요.”

“이미 집계된 자료라서 임의로 수정할 수 없습니다.”

“그럼 정정 요청을 넣으세요.”

“정정에는 협력망 내부 확인이 필요합니다.”

“확인을 했잖아요.” 해인은 세 답변을 가리켰다. “확인한 결과 책임자는 네 방향이고, 비용은 아직 아무 방향도 아니에요.”

박성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까지 하면 맨션은 실증 참여 이력이 없는 곳으로 남습니다.”

“참여하지 않았으니까요.”

“향후 지원 사업에서도 불리할 수 있습니다.”

해인의 표정이 굳었다. 외삼촌의 지원을 거절하고 무료 법률구조를 택했던 날처럼, 돈의 얼굴은 이번에도 온순한 척했다.

재호는 서울 회사의 검수 재개 제안서를 장부 뒤에서 꺼냈다. 접근 로그를 전송하면 이런 성과표의 판정에 외부 검수자로 이름을 얹을 수 있었다. 그 이름은 돈이 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주민들이 거부한 연결을 다시 만드는 열쇠이기도 했다.

그는 제안서를 펼치지 않고 두 손으로 찢었다. 한 번에 찢어지지 않아 종이가 길게 울었다.

윤정민이 조용히 물었다.

“그건 보관하던 조건서 아닙니까?”

“조건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완전히 포기하는 겁니까?”

“아니요. 외부 검수자가 되지 않기로 판정하는 겁니다.”

찢긴 종이 조각이 탁자 위에 네 방향으로 흩어졌다. 미경이 그중 하나를 집어 계산기 밑에 깔았다.

“이건 재활용됩니까?”

“비용은 안 됩니다.”

“그럼 종이값이라도 아껴야죠.”

오전 10시 6분, 해인은 장부의 새 면을 펼쳤다. 재호가 네 항목을 읽고, 해인이 받아 적었다.

접근 로그 보관 책임자: 협력망 운영지원팀장 직인만 확인, 개인 책임자 미확정. 현장 준비 완료 판정자: 공급업체 자동 상태값을 집계한 협력망 시스템, 판정 권한자 미확정. 비용 지급 회사: 협력망은 집행 예산, 서림주거관리는 협력망, 청명보안은 서림주거관리라고 각각 회신함. 주민 공간 명칭 사용: 설치·동의·수령 서명 없이 지산맨션 이름을 성과표에 사용함.

재호는 마지막 줄 아래에 적었다.

따라서 현장 준비 완료 1건은 무효. 접근 로그 30일 보관은 삭제 실패 상태 유지. 공동 회신은 성립하지 않음.

박성문이 장부를 손으로 덮었다.

“그 문장을 밖으로 보내면 협력망이 맨션을 위험 현장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위험한 건 현장이 아니라, 확인하지 않은 성공입니다.” 재호가 말했다.

한미수가 봉투에서 다른 용지를 꺼냈다.

“청명보안 내부에는 비용 지급 요청을 보류할 수 있는 칸이 있습니다. 다만 서림주거관리의 재요청이 있어야 합니다.”

“서림주거관리는 협력망 집행 예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집행 예산 담당자가 요청해야겠죠.”

네 방향이 다시 한 점으로 모이지 않았다. 대신 한미수의 말은 처음으로 돈을 멈출 수 있는 위치를 보여 주었다.

해인은 박성문에게 펜을 밀었다.

“협력망에 정정 공문을 요청하고, 서림주거관리에는 비용 청구 보류를 요청하세요. 오늘 오후 네 시까지요.”

박성문은 펜을 잡지 않았다.

“제가 단독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동 회신을 요구한 겁니다.”

최경태가 서류봉투를 들었다.

“저도 한 줄 쓰겠습니다. 현장 확인자 서명 거부. 자동 생성된 확인 이력의 정정 요구.”

박성문이 그를 보았다.

“그럼 대기비 지급이 더 늦어질 수 있습니다.”

“안 늦어질 수도 있죠.”

“가능성에 기대서 생계를 걸 겁니까?”

최경태는 잠깐 계산기를 보았다. 미경이 아직 들고 있었다.

“이미 제 이름을 걸고 생계를 계산하게 만들었잖습니까.”

그가 종이에 서명했다. 서명 뒤에는 주민도, 회사도 아닌 자기 이름만 남았다.

해인은 맨션 현관의 성과표 사본을 떼어 관리실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리고 빈 벽에 새 종이를 붙였다.

지산맨션 현장 준비 완료 집계: 무효 판정. 접근 로그: 30일 보관 책임자 미확정. 비용 지급: 공동 회신 불성립으로 청구 보류 요구. 정정 공문 기한: 9월 21일 오후 4시.

박성문은 종이를 찍으려 휴대전화를 들었다.

“촬영 승인 필요합니까?” 미경이 물었다.

그는 손을 내렸다.

“이건 주민 공간의 공지라서요.”

“그럼 주민이 먼저 찍겠습니다.”

해인이 사진을 찍어 공동 장부 뒤에 보관했다. 서울 회사로 보내지 않았다. 외부에 증명하려고 만든 사진이 아니라, 안에서 다시 성공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막기 위한 사진이었다.

오후 3시 47분, 협력망에서 자동 회신이 왔다. 정정 공문은 검토 중, 비용 보류는 담당 부서 확인 중이라는 두 줄이었다. 책임자는 여전히 없었다.

재호는 그 회신을 읽고 장부에 새 기한을 적었다. 내일 오전 9시, 담당 부서의 이름과 정정 공문 발행 여부 확인.

“또 기한이 생겼네요.” 수완이 말했다.

“기한은 사람이 없을 때 사람을 부르는 방법이니까요.”

해인은 관리실 불을 끄기 전에 공구 상자를 보관하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물건은 없었지만 바닥에는 바퀴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설치되지 않은 것은 상자였고, 설치된 것은 책임의 방향이었다.

복도등이 1층부터 켜졌다. 이번에는 어느 층도 늦지 않았다. 대신 관리실 문 안쪽의 빈 서명란 하나가 오래 어두웠다.

그날 맨션은 협력망의 성공 집계에서 빠졌다. 대신 네 기관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밀어낸 책임을, 한 장의 장부에 같은 시간으로 묶었다. 돈은 아직 오지 않았고, 최경태의 6만 원도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오전 9시에 확인해야 할 이름은 생겼다. 책임이 아니라, 책임을 피한 사람의 이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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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 시각: 2026-08-23T07:09:00+09:00

MOBOT 세계관 변환 근거

- 많은 후보를 한꺼번에 성공으로 묶은 탐색 작업 기록: 이번 회차의 상충 회신과 성공 집계의 책임 공백을 직접 만드는 핵심 자료다. - 네 대의 장비가 한 공급 관계로 묶인 탐색 기록: 설치되지 않은 물건이 완료로 계산된 이유와 작업자의 책임 회피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 큰 조직과 협력사가 함께 움직이는 관계 탐색 기록: 공동 회신을 요구한 전 화의 결과가 왜 단일 책임 확인으로 이어지지 않는지 설명한다. - 경쟁 관계는 확인됐지만 실제 책임 연결은 남지 않은 탐색 기록: 실제로 형성되지 않은 책임 관계를 드러내는 음영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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