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5
착공 전에는 손실을 청구할 수 없다
서울은 관계를 허가한다
배표 결제 화면의 마지막 숫자가 바뀌었다.
미결서울 네 구역의 주거 보증 만료가 열두 시간 앞당겨졌습니다.
그 아래에는 더 작은 문장이 붙어 있었다.
윤서진 개인 담보, 첫 집행을 시작합니다.
서진은 화면을 두 번 눌렀다.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법은 대체로 친절하지 않았고, 금융은 친절한 척하는 법도 잊은 지 오래였다.
“배가 떠나기 전부터 돈을 빼 가네요.” 민우가 옆에서 말했다. “승객 우대 서비스인가요?”
“당신 농담 비용까지 청구되기 전에 입 다물어요.” 라희가 말했다.
“그건 아직 보류입니까?”
“당신 농담은 영구 보류예요.”
부산 외항으로 가는 새벽 배의 승선구 앞에는 오선영과 두 명의 교대대표가 서 있었다. 김태수는 낡은 작업화를 벗지 않은 채 승선권을 내밀었고, 이나경은 투명 봉투 안의 저장매체 다섯 개를 두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마라는 그들 뒤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이번에는 외항 대표라는 표식이 없었다. 장갑도 끼지 않았다.
협력사 대표 둘은 서로 다른 상자를 들고 왔다. 하나에는 회전축 부품이, 다른 하나에는 센서 연결부가 들어 있었다. 두 상자 모두 봉인되어 있었지만 봉인의 색이 달랐다. 한쪽은 계약을 지키기 위한 파란색, 다른 쪽은 책임을 미루기 위한 회색이었다.
“출항 전에 적자고 했죠.” 오선영이 말했다. “누가 먼저 비용을 만들었는지.”
라희가 단말을 돌려 보였다. “이미 적혔어요. 감사비 지급, 외항 출고 지연, 미결서울 주거 보증 지연, 서진 씨 담보 집행.”
김태수가 화면을 읽었다. “여기에는 우리 대기 임금이 없는데요.”
“아직 판정 전입니다.”
“그럼 우리 시간은 계속 무료네요.”
첫 번째 선택지가 승선구에서 닫혔다. 다섯 원자료를 모두 열면 협력사들은 계약상 비밀을 위반할 수 있었다. 반대로 계약을 지키자고 원자료를 닫으면 현장 사람들의 대기 시간은 다시 자동화 일정의 부산물이 된다.
도윤이 카메라를 켰다. “원자료를 세 층으로 나눕시다. 사람 얼굴과 개인 연락처는 가리고, 기계의 시간·부품 상태·수동 개입 순간은 공개하고, 계약 가격은 별도 봉인하는 겁니다.”
감속기 협력사 대표 문세라가 고개를 저었다. “가격을 숨기면 우리가 비싼 부품을 밀어 넣었다는 소문이 납니다.”
“가격을 열면요?”
“다음 계약에서 빠집니다.”
민우가 회색 상자를 가리켰다. “그럼 상자 안에 정답이 있네요. 열면 손해, 안 열면 더 큰 손해.”
“그건 정답이 아니라 협박의 포장입니다.” 미옥이 말했다.
배의 출항 안내가 세 번 울렸다. 그때 외항 쪽 개발지원단에서 새 통신이 들어왔다. 바다 건너 매립지에 조성될 미래 산업구역의 착공 전 선급금을 오늘 안에 배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조건은 간단했다. 외항의 보류 기록을 현재 손실로 인정하고, 예정된 생산량을 담보로 청문을 종결할 것. 다섯 당사자가 공동 서명하지 않아도 됐다. 마라 혼자 서명하면 됐다.
마라의 얼굴이 굳었다.
“당신에게 다시 혼자 서명하라고 하네요.” 서진이 말했다.
“이번에는 거절할 겁니다.”
통신 속 개발지원단 담당자가 웃었다. “거절하시면 착공 전 협약에서 외항의 생산구역 예약이 빠집니다. 공장은 사람보다 빨리 지어져야 합니다.”
“아직 공장은 없죠.” 서진이 말했다.
“계획은 이미 승인된 가치입니다.”
“계획은 비용이 아닙니다.”
두 번째 선택지가 닫혔다. 선급금을 받으면 오늘의 임금과 치료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대신 아직 생산되지 않은 물량이 이미 발생한 위험을 덮게 된다. 거절하면 외항과 협력사 모두 미래 계약에서 밀릴 수 있고, 미결서울의 보증 지연은 그대로 남는다.
라희가 서진을 바라보았다. “공동계정에서 선급금을 받아 주거 보증을 먼저 메울 수도 있어요. 그러면 열두 시간은 줄어듭니다.”
“그 돈은 미래 공장의 돈이에요.”
“돈은 대체로 미래에서 와서 현재를 망칩니다.”
“이번엔 현재 비용을 미래의 약속으로 갚지 않겠습니다.”
라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서진의 말이 옳다는 표정과, 그 말 때문에 누군가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표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배가 출항했다. 유리창 밖으로 부산의 크레인이 천천히 뒤로 밀렸다. 심사동은 배 안 임시 청문실로 바뀌었다. 마라는 가운데 앉지 않았다. 오선영과 김태수, 이나경이 한 줄로 앉고, 두 협력사 대표가 맞은편에 앉았다. 미옥은 바닥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첫 번째 보류 기록부터.” 그녀가 말했다.
화면에는 열두 초짜리 영상이 떠올랐다. 작업기가 부품 상자를 들고 회전하다가 멈췄다. 공식 기록에는 수동 개입과 생산 실패만 남아 있었다. 현장 영상에는 김태수의 손이 비상 차단 레버를 당기는 장면이 있었다.
김태수가 말했다. “회전축이 먼저 떨렸어요. 그 다음에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문세라가 저장매체를 연결했다. “우리 부품 원자료에는 기준 안의 진동으로 나옵니다.”
도윤이 시간축을 겹쳤다. 진동은 기준 안이었지만, 기준선이 세 번 바뀌어 있었다. 그중 두 번은 장시간 학습장에서 정상 동작으로 분류된 뒤 삭제된 흔적이었다.
“학습장에서는 왜 없어졌죠?” 서진이 물었다.
문세라가 대답하지 못하자 마라가 말했다. “성공한 동작만 다음 단계로 올라갔습니다. 멈춘 동작은 학습 실패로 분류됐고요.”
김태수가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목을 긁는 소리였다. “그럼 제가 기계를 살린 건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 게 아니라, 성공에서 삭제된 시간을 다시 가져온 거네요.”
미옥이 부품 상자를 열었다. 회전축 안쪽에 얇은 금속 가루가 묻어 있었다. 문세라가 손가락으로 그것을 만졌다가 바로 닦았다.
“이건 교체 전까지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교체비는요?” 라희가 물었다.
“부품 두 개와 검사비, 사백팔십만 원.”
“대기 임금은 삼백십만 원.” 오선영이 말했다. “열아홉 명이 멈춰 있었습니다.”
“출고 지연 손실은요?” 마라가 물었다.
“그건 예정 생산량으로 계산하면 천이백만 원입니다.” 개발지원단 담당자가 끼어들었다.
서진이 바로 잘랐다. “예정 생산량은 제외합니다.”
“그러면 외항의 손실 청구가 무너집니다.”
“무너지는 건 청구가 아니라 추정입니다.”
화면 한쪽에서 서진의 담보 집행 알림이 다시 떴다. 첫 달 보수와 미지급 자문료 일부가 공동계정으로 넘어갔다. 라희가 그 알림을 보았다.
“지금 실행됐어요.”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내겠다고 했으니까요.”
“이 돈을 보류 기록 비용에 넣으면 서진 씨가 외항을 대신 구제한 꼴이 됩니다.”
“아니요. 이 돈은 기록을 여는 비용입니다. 판정 결과와 분리하세요.”
그 말에 오선영이 저장매체를 앞으로 밀었다. “그럼 우리도 대기 임금 청구를 직접 넣겠습니다. 외항 청구 안에 섞지 말고요.”
두 번째 기록은 이나경의 것이었다. 센서 연결부가 빠졌고, 그녀는 잠금등이 켜진 상태에서 케이블을 다시 꽂았다. 작업은 사십 분 늦어졌고 센서 하나가 손상됐다.
“저는 사람을 피하려고 멈춘 게 아니에요.” 이나경이 말했다. “라인을 다시 살리려고 했습니다.”
센서 협력사 대표 조한결이 고개를 숙였다. “연결부의 잠금쇠가 규격보다 약했던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잠금등이 켜진 뒤 손을 넣은 건 작업 절차 위반입니다.”
“그럼 누구 책임입니까?”
“둘 다입니다.”
“둘 다라고 하면 대개 작은 쪽이 먼저 냅니다.” 미옥이 말했다.
조한결이 봉인된 회색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파손된 연결부와 검사표가 있었다. 검사표에는 출고 전 검사 완료라고 적혀 있었지만, 검사 시점의 사진에는 잠금쇠가 닫히지 않은 흔적이 보였다. 이나경의 우회 행동은 규칙 위반이었지만, 그 행동을 유발한 결함도 분명했다.
서진은 두 기록을 나란히 놓았다.
“첫 번째는 구조 행위로 조건부 인정합니다. 감속기 결함 조사와 교체비는 협력사가 부담하고, 대기 임금은 외항이 직접 지급합니다. 공동계정은 기록 보존비만 부담합니다.”
문세라가 반발했다. “외항이 우리 부품을 여러 곳에서 비교하겠다고 해 놓고, 이제 모든 비용을 우리에게 넘기면 공급망을 다변화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변화는 책임을 여러 곳으로 흩는 제도이지, 책임을 없애는 제도가 아닙니다.”
문세라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결국 손바닥으로 회전축의 금속 가루를 쓸어냈다.
“검사비는 우리가 냅니다. 단, 다음 부품 비교표에 검사 결과를 공개해 주세요.”
“공개하겠습니다.” 도윤이 말했다.
“당신이 아니라 공동 서명으로.”
마라가 장갑 없는 손을 내밀었다. 문세라는 잠시 보다가 악수하지 않고 저장매체에 서명했다.
두 번째 기록에 대해 서진은 말을 늦췄다.
“이나경의 행동은 구조 행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연결부 결함은 협력사 책임입니다. 손상된 센서 재검증비와 연결부 교체비는 협력사가 부담하고, 이나경에게 개인 청구는 하지 않습니다. 작업 절차 위반 교육비는 외항의 안전예산에서 분리 지급합니다.”
이나경이 물었다. “제가 틀렸다는 기록은 남나요?”
“남습니다.”
“그럼 저는 실패한 사람으로 남겠네요.”
“아니요. 위험한 행동을 했지만 구조 행위는 아니었다는 기록으로 남습니다. 둘을 섞지 않는 게 당신을 지우지 않는 방식입니다.”
민우가 작게 말했다. “기록이 사람보다 복잡해졌네요.”
“사람이 원래 복잡했습니다.” 미옥이 대답했다.
청문실의 벽이 흔들렸다. 배가 파도를 만난 것이 아니라, 개발지원단이 마지막 조건을 보낸 것이었다. 착공 전 선급금은 오늘 지급하지 않는다. 대신 다섯 당사자가 미래 생산구역의 우선권을 유지하려면 공동 서명으로 예정 물량과 현장 책임을 보증해야 한다는 통지였다.
라희가 통지를 읽고 웃었다. “이제 미래도 보증금을 요구하네요.”
서진은 화면을 껐다. “보증할 수 없는 것을 보증하지 맙시다.”
마라가 다섯 사람을 보았다. “외항의 다음 청구는 제가 제출하지 않겠습니다. 오선영, 김태수, 이나경, 문세라, 조한결이 각자 원자료와 비용 항목을 들고 공동 제출합니다.”
조한결이 물었다. “그러면 우리도 외항의 손실을 같이 떠안습니까?”
“떠안는 게 아니라, 당신 부품에서 생긴 비용을 당신 항목으로 적는 겁니다.”
오선영이 말했다. “우리도 작업자 이름을 지우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름은 책임 항목과 함께 적어요.”
서진은 마지막 문장을 직접 썼다.
‘착공 전 생산량·예정 수익·공개되지 않은 단가는 현재 발생한 임금·치료·검사·재검증 비용의 담보로 사용할 수 없다.’
개발지원단 담당자가 즉시 항의했다. “그 문장이 들어가면 공공 재편 사업의 속도가 늦어집니다.”
“속도는 비용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그럼 착공은 지연될 수 있습니다.”
“이미 늦어진 사람들의 시간을 먼저 계산하세요.”
최종 판정이 화면에 올랐다.
첫 번째 보류 기록은 결함 부품과 작업자 회피가 결합된 조건부 구조 행위로 인정한다. 감속기 교체·검사 비용 사백팔십만 원은 협력사가 부담하고, 열아홉 명의 대기 임금 삼백십만 원은 외항이 직접 지급한다. 공동계정은 기록 보존과 반론 진행 비용만 부담하며 세 금액은 상계하지 않는다.
두 번째 보류 기록은 구조 행위로 인정하지 않는다. 연결부 결함에 따른 교체·재검증 비용은 협력사가 부담하고, 작업 절차 위반 교육비와 사십 분 대기 임금은 외항 안전예산에서 지급한다. 이나경 개인에게 손해배상 청구는 금지한다.
외항의 예정 출고 손실과 미래 생산량은 지급 순서에서 제외한다. 미결서울 네 구역의 주거 보증 열두 시간 지연은 공개 채무로 유지한다. 서진의 개인 담보 첫 집행액은 감사와 기록 보존 비용으로만 사용한다.
모두가 조용해졌다.
승리는 없었다. 대신 다섯 사람이 같은 문서에 서로 다른 책임을 적었다. 그것은 악수보다 오래 걸리고, 악수보다 덜 낭만적이었다.
배가 외항 부두에 닿을 무렵, 공동 서명문이 전송됐다. 마라의 단독 대표권은 완전히 끝났다. 외항은 이제 교대대표 셋과 협력사 둘의 원자료 없이는 손실을 청구할 수 없었다.
지우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열두 시간 지연은 그대로예요. 하지만 이번 판정이 끝났으니 주거 보증 지급 순서에서 감사비 다음 항목으로 올릴 수 있습니다.”
라희가 답장을 쓰려다 멈췄다. “줄어든다고 약속하지 마.”
서진이 말했다. “대신 언제 움직이는지 적어요.”
라희는 문장을 고쳤다.
‘열두 시간 지연은 해소되지 않았으며, 다음 지급 순서의 첫 공개 장애로 유지한다.’
부두 밖으로 나오자 새 통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매립지 7공구의 착공 전 협약을 다음 날 새벽까지 확정하지 않으면, 외항과 협력사의 우선 생산구역 예약이 취소된다는 내용이었다. 협약에는 현장 대표 다섯 명의 책임 항목과 데이터 공개 범위를 직접 적어야 했다.
민우가 통지문을 읽었다. “이번에는 배를 타고 또 가야 하나요?”
도윤이 카메라를 껐다. “이번에는 아직 땅도 없는 곳으로 가야죠.”
“그럼 농담을 준비하겠습니다.”
“그건 다음 청문에서 판정합니다.”
서진은 손바닥 위의 부서진 인장 조각을 보았다. 조각에는 더 이상 중앙의 문양이 없었다. 대신 다섯 사람의 서명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번져 있었다.
미래의 공장은 아직 없었다. 그러나 그 공장이 누구의 시간을 먼저 요구할지는 이미 정해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착공 전에, 책임부터 땅에 박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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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 시각: 2026-08-21T08:20:43+09:00
MOBOT 세계관 변환 근거
- 해안 산업 거점을 로봇·인공지능·에너지 중심으로 공공 재편하려는 계획: 미래 공장의 계획을 현재 손실의 근거로 사용할 수 있는지와 현장 대표의 참여 조건을 결정하는 데 직접 사용했다. - 생산라인 투입 전 작업 데이터를 오래 쌓아 검증하는 학습 시설: 현장 사고 직전의 감속과 정지가 학습장에서는 실패로 삭제된 이유를 공동 청문에서 검증했다. - 로봇 부품 협력사들이 한 곳에 의존하지 않고 경쟁적으로 공급망에 진입하는 흐름: 보류 기록의 비용을 외항 하나의 청구가 아니라 협력사와 현장 교대조의 분리된 책임으로 판정하는 데 사용했다. - 고성능 로봇의 실제 가격과 상용 경쟁력이 충분히 공개되지 않은 보도: 실제 발생 비용과 아직 공개되지 않은 사업성 추정을 분리하는 판정 원칙을 강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