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02
세탁기는 빈방에서 끝나지 않는다
지산맨션에는 빈방이 없다
202호 문을 밀자마자 물방울 하나가 재호의 손등에 떨어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빼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 안쪽에서 물이 고이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방 한가운데 놓인 세탁기는 아무도 만지지 않았는데도 예약 표시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복도에 서 있던 해인이 계량기함을 열었다. 숫자가 일정한 간격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302호 전기가 또 들어갑니다.”
재호는 202호 세탁기의 플러그를 뽑았다. 동시에 위층에서 세탁기 종료음이 울렸다. 삐, 삐, 삐. 복도에 모여 있던 주민들의 시선이 302호로 몰렸다.
“이제 확실하네요.” 도윤이 말했다. “두 방이 한 작전망에 걸려 있습니다.”
“작전망 말고 배선 문제예요.” 재호가 대꾸했다.
그는 202호 욕실 천장 아래에 대야를 받쳤다. 물은 잠시 멈추는 듯하다가 다시 떨어졌다. 해인은 바닥에 흘러나온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냄새를 맡았다.
“세제 냄새가 나요.”
재호는 302호로 뛰어 올라갔다. 문을 열자 욕실 바닥에 얇은 물막이 생겨 있었다. 세탁기는 전원이 꺼진 상태였지만 화면에는 예약 완료라는 글자가 남아 있었다. 세탁기 아래에서 욕실 배수구 쪽으로 물이 번졌고, 그 끝은 벽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가 기계를 조금 밀자 뒤쪽 호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배수 호스가 원래 방향과 반대로 꺾여 있었다. 누군가 호스를 길게 늘여 벽 쪽 배관에 억지로 끼워 둔 흔적이 보였다.
“이걸 누가 이렇게 해 놨죠?” 해인이 물었다.
“모릅니다. 다만 최근에 한 번 손댄 건 확실해요.”
관리실에서 가져온 도면에는 202호와 302호 욕실이 같은 수직 배관을 쓰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재호는 도면을 벽에 대고 배관 위치를 짚었다. 같은 관을 쓰면서 전기 회로까지 엉켜 있다면, 어느 한쪽을 고칠 때 다른 쪽이 먼저 멈출 수 있었다.
1층에서 장미경의 목소리가 터졌다.
“냉동고가 또 멈췄어요!”
재호는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갔다. 분식집 안쪽의 냉동고 모터가 낮게 으르렁거리다가 멈춰 있었다. 녹은 아이스크림이 바닥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302호 차단기를 다시 올렸죠?” 해인이 뒤따라오며 물었다.
“1층 냉동고를 살리려면 올려야 합니다.”
“그 차단기가 어느 회로인지 확인했어요?”
재호는 대답 대신 차단기함을 열었다. 302호라고 적힌 표지 옆에 붉은 펜으로 물음표가 그려져 있었다. 그는 손전등으로 표지 뒤를 비췄다. 오래된 선 두 가닥이 다른 선들과 뒤엉켜 있었다.
“일단 내려간 차단기를 올리고, 302호 세탁기를 완전히 분리하겠습니다.”
“그러면 또 다른 곳이 멈출 수 있어요.”
“그럼 멈추는 곳부터 확인하죠.”
재호가 차단기를 올리자 냉동고가 다시 돌아갔다. 동시에 3층 복도등이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아래층에서는 보일러가 켜졌다 꺼지는 소리가 났다. 주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옥상 배관실로 올라간 재호는 낡은 밸브 네 개를 확인했다. 밸브 손잡이 하나에는 302라는 숫자가 매직으로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임시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호스는 배관실 벽을 지나 3층 욕실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재호가 밸브를 돌리자 금속 안쪽에서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손을 멈췄다. 바로 다음 순간 호스가 부풀어 올랐다.
“잠가요!” 해인이 소리쳤다.
재호가 밸브를 반대쪽으로 돌렸지만 호스 끝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물은 그의 손목을 타고 소매 안으로 흘렀다. 해인이 관리실에서 가져온 수건을 던졌다.
“손으로 막지 말고 밸브부터 찾아요!”
“지금 이게 밸브입니다!”
“그럼 사람을 부르세요!”
재호는 결국 외부 기술자를 불렀다. 기술자가 오기까지 40분 동안 주민들은 각자 양동이와 수건을 들고 202호와 302호를 오갔다. 그 사이 1층 냉동고는 세 번 더 멈췄고, 2층 보일러는 완전히 꺼졌다.
장미경은 젖은 양말을 벗어 들고 관리실에 들어왔다.
“고치는 동안 다른 게 죽으면 그건 수리가 아니에요. 고장 순서를 바꾸는 거지.”
재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해인은 지갑을 꺼내 카드부터 내밀었다.
“임시 부품은 제가 살게요. 미경 씨 손실도 먼저 보상하고요.”
재호가 카드 단말기 앞에서 그녀의 손을 막았다.
“기록 없이 개인 돈이 들어오면 안 됩니다.”
“그럼 기록하고 제가 내면 되죠.”
“나중에 그 돈이 결정권이 되면요?”
해인의 표정이 굳었다.
“제가 돈 냈다고 주민들에게 나가라고 할 사람처럼 보여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돈을 낸 사람이 언제든 판단을 대신할 수 있는 구조가 되는 게 문제예요.”
장미경이 두 사람 사이에 녹은 아이스크림 영수증을 밀어 넣었다.
“둘 다 맞는 말은 그만하고, 오늘 손실부터 적어요. 누구 돈인지, 언제 갚을지, 누가 승인했는지. 그걸 적으면 되잖아요.”
수완은 곧바로 장부를 펼쳤다. 임시 부품비, 아이스크림 손실, 복도등 교체비, 보일러 점검비가 별도 항목으로 나뉘었다. 해인은 임시 부품비를 개인 대여금으로 적었고, 미경의 손실은 공동기금에서 우선 지급하되 다음 회의에서 승인받기로 했다.
기술자는 오후 늦게 도착했다. 그는 302호 세탁기 뒤쪽과 옥상 호스를 번갈아 살폈다. 호스의 연결 방향이 몇 차례 바뀐 흔적이 나왔다. 벽 안쪽에는 손으로 조인 흔적과 새로 긁힌 나사 자국도 있었다.
“단순 누수는 아닙니다.” 기술자가 말했다.
해인이 물었다.
“그럼 뭡니까?”
“물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한 흔적입니다. 누가 했는지는 설비가 말해 주지 않아요.”
재호는 그 말을 장부에 적었다. 누수 원인은 미확정. 배관 방향 변경은 확인. 사용 흔적 있음.
기술자가 임시 호스를 잘라 내고 연결 부위를 교체하자 302호의 물소리가 줄었다. 하지만 3층 복도등은 완전히 꺼졌고, 보일러는 다시 켜지지 않았다. 기술자는 정식 수리 견적을 내놓았다. 130만 원. 공동기금 잔액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임시 부품으로 버티면 7만 8천 원입니다.”
“얼마나 갑니까?” 재호가 물었다.
“모릅니다.”
해인이 견적서를 바라보았다.
“그럼 정식 수리는 주민들이 결정해야 해요.”
재호는 정식 수리를 바로 진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민들 앞에서 공동기금 잔액을 확인하는 순간, 그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장미경은 가게 냉동고가 하루만 더 멈춰도 문을 닫아야 한다고 했고, 도윤은 공동기금을 한 번에 쓰면 다음 고장에 손쓸 수 없다고 했다.
수완은 투표 용지를 만들었다. 정식 수리, 임시 수리 유지, 사용자 확인 뒤 결정. 어느 선택도 당장 문제를 끝내 주지 못했다.
회의가 끝난 뒤 재호는 혼자 302호에 올라갔다. 세탁기 아래에서 작은 휴대전화가 발견되어 있었다. 전원은 꺼져 있었지만 화면 가장자리에는 글자 하나가 남아 있었다.
싸게 고치면 오래 못 갑니다.
발신 번호는 없었다. 해인은 휴대전화를 봉투에 넣고 봉인했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어요.”
“아직은 그 문장이 누가 쓴 건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계속 같은 말이 나와요.”
“같은 말이 나온다는 사실과 누가 썼는지는 나눠서 봐야 합니다.”
재호는 장부에 문장의 발견 시각을 적었다. 해인은 그의 뒤에서 가방을 열었다. 서류 한 장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8월 29일 매각 심사 안내.
재호가 서류를 주워 들었다. 공실 확인, 무단 사용 흔적 없음, 관리비 연체 없음, 민원 최소화. 아래쪽에는 작은 글씨로 기존 거주민 동의 여부 확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걸 알고 있었습니까?”
해인은 서류를 빼앗지 않았다.
“날짜만 알고 있었어요. 조건은 오늘 확인했습니다.”
“주민들에게 말했습니까?”
“아직요.”
“왜요?”
해인은 젖은 벽을 바라보았다.
“말하는 순간 모두가 이 방을 비우는 문제로만 생각할까 봐요. 아직 실제 사용자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숨기면 주민들은 나중에 자기들 몰래 결정됐다고 생각할 겁니다.”
“알아요.”
그녀는 서류를 접어 다시 가방에 넣었다. 재호는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심사일과 조건은 장부에 적었다. 확인한 사람은 재호 한 명, 알고도 공개하지 않은 사람은 해인 한 명이었다.
그날 밤 관리실 게시판에는 정식 수리 여부를 주민들이 결정한다는 공지가 붙었다. 공지 아래 누군가 또 같은 문장을 적었다.
싸게 고치면 오래 못 갑니다.
재호는 지우지 않고 발견 시각만 적었다. 해인은 302호 우편함에서 나온 K.서 이름의 영수증을 펼쳤다. 중고 세탁기 판매처와 수성못 근처 물결세탁소 주소가 함께 적혀 있었다.
“내일 판매자를 만나 봐요.”
“혼자 갈게요.”
해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같이 가요.”
그 말은 명령이 아니었다. 재호는 영수증을 접어 파일에 넣었다.
“그럼 기록부터 챙기죠.”
두 사람이 관리실 문을 잠그는 순간 302호에서 종료음이 울렸다. 곧이어 1층 냉동고가 다시 멈췄다. 장미경의 고함이 계단 아래에서 터졌다.
“이번엔 아이스크림 말고 사람부터 살려요!”
재호는 차단기함으로 뛰어갔고, 해인은 영수증과 봉인된 휴대전화를 챙겼다. 복도등이 한 층씩 늦게 켜졌다. 마지막 불이 들어오자 202호 안쪽에서 예약 세탁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중고시장 주소를 들고 현관을 나섰고, 닫힌 302호 안에서는 전원이 끊긴 세탁기의 종료음이 한 번 더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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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 시각: 2026-08-20T09:23:20+09:00
MOBOT 세계관 변환 근거
- 기존 방식을 버리고 전동식으로 전환한 신형 기술: 세탁기 종료음과 누수의 연결에 사용했다. - 유압식에서 전동식으로 바뀐 기술 선택: 재호의 수리 선택이 다른 고장을 만드는 장면에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