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05
302호를 비우는 회의
지산맨션에는 빈방이 없다
수성못 산책로의 바람이 판넬 모서리를 들썩였다. 재호가 양손으로 기록판을 붙잡는 동안 도윤은 의자 세 개를 줄 맞춰 놓았고, 장미경은 간식 상자의 수량을 다시 세었다. 해인은 주민협약 사본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
“소음 기록은 이쪽, 수리비는 저쪽에 둡시다.”
수완이 말했다.
“사람들이 제일 먼저 보는 건 추정 칸일 텐데요.”
“그러니까 확인된 사실을 앞에 세워야죠.”
재호는 302호에서 측정한 팬 작동 시각과 202호 초인종, 세탁기 종료음의 순서를 판넬에 붙였다. 옆에는 장미경의 냉동고 손실 영수증과 복도등 교체비가 놓였다. 누군가 지나가며 말했다.
“방 하나 때문에 주민들이 장사까지 나왔네요.”
미경이 돌아보았다.
“방 하나가 소리를 내면, 누군가는 냉동고 값을 물어야 하거든요.”
사람들은 판넬 앞에 모여들었다. 수완은 공실로 등록된 302호에서 전기와 물 사용 흔적이 확인되었다고 설명했다. 추정 칸에는 두 방을 오간 사람, K.서라는 이름, 오래된 열쇠가 적혀 있었다. 아직 모르는 칸에는 실제 사용자의 이름과 계약서의 효력이 남아 있었다.
“왜 모르는 걸 따로 적어요?” 한 관람객이 물었다.
수완은 붉은 펜으로 셋째 칸을 가리켰다.
“모르는 걸 사실처럼 말하지 않기 위해서예요. 이 칸이 없으면 소문이 곧 판결이 됩니다.”
해인은 부스 앞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출입선을 안내했다. 장부를 만지려는 손을 막고, 사진을 찍어도 되는 범위를 설명했다. 재호가 선착장 쪽에 몰린 사람들을 정리하자 해인은 반대편 통로를 열었다. 두 사람은 각자 움직이면서도 서로의 위치를 계속 확인했다.
저녁이 깊어질 무렵, 주민 회의가 시작됐다. 의자는 부족했고, 사람들은 판넬 앞과 산책로 난간에 기대 서 있었다. 도윤은 호루라기를 목에서 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결정할 건 세 가지입니다. 302호를 누가 확인할지, 수리비를 어떻게 마련할지, 그리고 매각 심사 취소를 주민들이 받아들일지입니다.”
장미경이 곧장 손을 들었다.
“네 가지예요. 간식비를 누가 내는지도 정해야 합니다.”
몇몇 주민이 웃었지만 분위기는 금방 가라앉았다. 해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매각 심사 안내문과 주민 동의 조건을 차례로 읽었다.
“8월 29일 심사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공실 확인, 무단 사용 흔적 없음, 관리비 연체 없음, 민원 최소화가 조건이었습니다. 저는 심사 날짜를 알고도 주민들에게 바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왜 숨겼습니까?”
“방을 비우면 심사가 빨라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 사용자를 확인하기 전에는 그 말을 주민들에게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판단을 누가 맡겼어요?”
“아무도 맡기지 않았는데 제가 가져갔습니다.”
해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 심사를 취소했습니다. 주민 동의 없이 302호를 공실로 만들거나, 방 안의 기록을 치우는 절차에는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재호는 해인의 말이 끝난 뒤에야 심사 취소 통화 시각을 장부에 적었다. 수완은 사실과 해인의 판단을 분리해 기록했다.
한 주민이 소리쳤다.
“집주인 쪽 사람이 매각을 막는 척하면서 결국 더 비싸게 팔려는 것 아닙니까?”
해인은 곧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공개된 자료 중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매수자가 누구인지, 가족이 어떤 조건으로 합의했는지 저는 모릅니다. 주민 동의가 없으면 심사가 어렵다는 말만 확인했습니다.”
“모른다면서 왜 취소했어요?”
“모르는 상태에서 방을 비우는 선택부터 할 수는 없었습니다.”
재호가 말했다.
“심사 취소로 수리비를 마련할 돈이 줄어든 것도 같이 기록해야 합니다. 건물을 지키는 선택이 비용을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그 말에 주민들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도윤은 수리비 표를 펼쳤고, 미경은 자신의 손실 영수증을 들어 보였다.
“제가 원하는 건 해인 씨의 사과만이 아니에요. 앞으로 누가 무엇을 결정할지 정하는 겁니다. 저는 돈을 냈다는 이유로 발언권이 커지는 것도 싫고, 돈을 못 냈다는 이유로 문밖에 서 있는 것도 싫어요.”
수완은 그 말을 협약 초안에 적었다. 안전 위험은 즉시 수리한다. 방 안의 물건은 주민 두 명 이상 입회 없이 옮기지 않는다. 실제 사용자를 확인하지 않은 채 공실로 단정하지 않는다. 매각과 임대 관련 서류는 주민에게 공개한다.
“감시 규칙도 필요합니다.” 도윤이 말했다.
그날 밤 맨션 302호 앞에서 주민들은 다시 의자를 펼쳤다. 수성못 행사에 오지 못한 사람들도 합류했다. 문 앞에는 입회자 명단과 출입 시각표가 붙었다. 혼자 문을 열지 않는다. 물건을 반출하지 않는다. 소음과 물은 사진과 시각으로 남긴다.
밤 열한 시가 가까워졌을 때, 302호 안쪽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주민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해인이 문 앞으로 다가갔지만 재호가 손을 들어 막았다.
“입회자 확인부터요.”
도윤이 명단을 펼쳤다. 재호, 해인, 수완, 미경, 도윤. 다섯 명이 같은 줄에 서명했다. 문 아래로 작은 금속 열쇠가 밀려 나왔다. 열쇠에는 수성못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장미경이 낮게 말했다.
“행사장에 온 사람과 같은 사람이었을까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수완이 대답했다.
“그럼 열쇠가 나왔다는 사실만 적어요.” 재호가 말했다.
아무도 문을 열지 않았다. 해인은 열쇠를 투명 봉투에 넣고 발견 시각을 적었다. 재호는 문 앞 임시 협약의 마지막 줄을 확인했다. 주민들은 302호를 점거하지 않는다. 다만 누구도 혼자 비우거나 봉인하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해인은 관리실에서 302호를 임시 공동 확인 공간으로 등록했다. 등록 사유에는 소음과 누수의 원인 확인, 외부 점검 입회, 주민 기록 보관이라고 적었다. 재호가 서류를 읽다가 물었다.
“공동 공간이면 누가 사용할 수 있습니까?”
“주민 확인 시간에만요. 개인 방처럼 쓰지는 않아요.”
“그럼 출입 규칙도 같이 붙여야 합니다.”
해인은 등록서 아래에 규칙을 덧붙였다. 출입자 기록, 물품 이동 금지, 사진 원본 공동 보관, 발견물의 임의 폐기 금지. 재호는 그 옆에 자신의 이름을 쓰고, 해인은 한 칸 아래에 이름을 적었다.
수성못 행사는 이틀 동안 이어졌다. 주민들은 맨션의 문제를 공개하는 일과 돈을 마련하는 일을 분리하려고 애썼다. 모금함에는 관람객들이 넣은 돈만 받았고, 이름 없는 봉투나 조건이 적힌 돈은 별도 상자에 넣었다. 도윤은 모금함을 옮길 때마다 두 명의 서명을 받았다. 미경은 간식비와 운반비를 따로 계산했다.
재호는 행사 수익을 바로 쓰지 않고, 안전 수리와 선지출 상환, 공동기금 적립의 순서를 적어 두었다. 해인은 외부 후원금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봉인된 봉투를 바라보았다.
“저 돈을 받으면 보일러를 바로 고칠 수 있어요.”
“조건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이미 조건을 읽었잖아요. 공동 운영 공개와 매각 자료 제공.”
“자료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아요. 누군가 그 빈칸을 자기 판단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해인은 봉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번에는 주민들 앞에서 결정하죠.”
행사 마지막 날 저녁, 회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다시 부스 앞에 나타났다. 그는 자신을 K.서의 대리인이라고 소개했다. 손에는 흰 봉투와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행사 수익이 많이 모였군요.”
재호는 모금함을 덮었다.
“아직 정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 돈부터 받으시죠. 150만 원입니다.”
남자가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해인은 봉투를 열지 않고 약정서부터 펼쳤다.
“조건을 주민들 앞에서 읽어 주세요.”
대리인은 종이를 넘겼다.
“302호 공동 운영을 공개하고, 매각 협상 자료를 제공하는 조건입니다. 수리비로 사용하셔도 됩니다.”
“매각 협상 자료의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재호가 물었다.
“매수자가 확인해야 할 범위입니다.”
“그 표현은 계약서에 없습니다.”
“주민들이 돈이 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건을 조금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장미경이 봉투를 바라보며 말했다.
“돈이 급하다고 영수증 없는 간식을 받지는 않아요.”
대리인은 미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해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해인 씨가 받으면 가족 간 절차도 빨라질 겁니다.”
해인은 그 말에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가족 절차와 주민 수리비를 섞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봉투를 주민 장부 옆에 놓고, 수령 보류라고 적었다. 재호는 외부 봉투와 행사 모금함을 서로 다른 상자에 넣었다. 수완은 보류 사유를 기록했다. 조건 범위 미확정, 매각 자료 제공 요구, 주민 공동 결정 필요.
대리인은 한동안 말없이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후원금은 선의입니다.”
“선의라면 조건도 공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해인이 말했다.
“거절하면 수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재호가 행사 수익 배분표를 펼쳤다. 아직 최종 금액은 계산 중이었지만, 주민들의 선지출과 안전 수리비, 공동기금으로 나누어 쓰기로 한 순서는 명확했다.
“우리 돈부터 정산합니다. 외부 돈은 나중에 조건이 확인되면 다시 판단하겠습니다.”
대리인은 봉투를 회수하지 않았다. 대신 서류철을 닫으며 말했다.
“그럼 이 돈은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연락하시죠.”
해인은 봉투 위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저었다.
“받지 않은 돈을 맡아 두지도 않겠습니다.”
재호는 주민 두 명의 입회 아래 봉투를 대리인에게 돌려주었다. 남자는 봉투를 받아 들었지만 바로 떠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장부의 모금 기록과 302호 사진을 차례로 훑었다.
“공개는 오래 갑니다.”
“그래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뒤돌아 산책로 쪽으로 걸어갔다. 오리배 불빛이 그의 회색 셔츠 위에서 흔들렸다.
행사장에는 아직 주민들이 남아 있었다. 도윤은 모금함을 세 번 확인했고, 미경은 간식 상자의 남은 수량을 적었다. 수완은 사실과 추정, 모름 칸을 다시 정리했다. 해인은 수성못 열쇠가 든 봉투를 장부에 붙였다.
재호는 마지막 판넬을 떼어 상자에 넣었다.
“내일 정산합시다.”
“오늘 다 끝내면 안 돼요?” 도윤이 물었다.
“돈을 세는 사람과 쓰는 사람을 나누기로 했잖아요.”
해인이 말했다.
“오늘은 받은 돈을 봉인하고, 내일 주민들 앞에서 배분하죠.”
모금함이 봉인되자 주민들은 의자와 상자를 나누어 들었다. 재호는 장부를 품에 넣었고, 해인은 수성못 열쇠가 든 봉투를 들었다. 둘은 같은 상자를 들지 않았지만, 계단을 오를 때 서로의 속도를 맞췄다.
맨션 현관에 도착하자 3층 복도등이 늦게 켜졌다. 302호 문 아래에는 물기가 번져 있었다. 재호가 멈춰 섰지만 해인이 먼저 출입표를 펼쳤다.
“두 명 이상 입회.”
주민들이 하나씩 서명했다. 문 안쪽에서 팬이 짧게 돌다가 멈췄다. 누구도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해인은 302호 임시 공동 확인 공간 등록서 아래에 새 문장을 적었다.
비우지 않되 독점하지 않는다.
재호가 그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행사 수익 봉인 상자를 관리실 금고에 넣고, 외부 후원금은 따로 돌려보냈다는 기록을 남겼다.
다음 날 아침, 주민들은 관리실에 모여 모금함을 열기로 했다. 그때 수성못에서 보았던 회색 셔츠의 남자가 현관을 지나 1층 계단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같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는 주민들이 모인 관리실 문 앞에 멈춰 서서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렸다.
“후원금 조건부터 다시 읽으시죠.”
재호는 장부를 펼쳤다.
“돈보다 먼저, 누구의 돈인지 확인하겠습니다.”
남자는 해인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럼 가족 쪽 장부도 같이 보셔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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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 시각: 2026-08-20T09:23:20+09:00
MOBOT 세계관 변환 근거
- 새 노동 방식 도입을 둘러싼 파업과 갈등: 매각 심사를 취소하고 공동 규칙을 만드는 장면에 사용했다. - 큰 변화 앞에서 노동자가 충격을 받고 부분 파업에 들어간 보도: 회의가 권리 협약으로 바뀌는 역전에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