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06
오리배보다 먼저 온 청구서
지산맨션에는 빈방이 없다
빠른집 설비의 차량은 수성못 행사 뒤 지산맨션까지 따라왔다. 아침이 되자 회색 트럭이 현관 앞에 서 있었고, 대표는 계약서 원본을 담보로 달라는 말을 다시 꺼냈다. 재호는 관리실 탁자 위에 젖은 봉투를 펼쳐 놓고 그를 맞았다.
“원본은 넘기지 않겠습니다.”
대표는 견적서를 내밀었다.
“그럼 공사는 보류합니다. 저희도 아무 보증 없이 벽을 뜯을 수는 없어요.”
“보증은 계약서에 넣으면 됩니다.”
“공동기금 잔액으로는 선급금도 안 나옵니다.”
주민들이 하나둘 관리실로 들어왔다. 해인은 행사 수익 배분표를 칠판에 붙였다. 93만 원 중 50만 원은 안전 수리, 16만 원은 주민 선지출 상환, 27만 원은 공동기금으로 남아 있었다. 외부 후원금 150만 원은 별도 봉투에 봉인되어 있었다.
장미경은 선지출 상환표에서 자신의 이름을 가리켰다.
“이 돈은 행사 간식과 운반비예요. 못 받더라도 언제까지 보류인지 적어 주세요.”
수완은 지급 예정일 칸을 만들었다. 도윤은 빠른집 대표 앞에 의자를 놓았다.
“공동 협상입니다. 대표님도 앉으세요.”
대표는 앉지 않고 말했다.
“저희도 부품값을 먼저 내야 합니다. 다른 현장에서는 새 부품으로 견적을 내고 중고 부품을 넣으라는 요구까지 받습니다.”
재호는 대표의 기름 묻은 손과 닳은 작업화를 보았다. 사정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 사정이 주민들의 서류를 가져갈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새 부품과 재사용 부품을 견적서에 따로 적으세요. 어떤 부품을 쓰는지 주민이 입회해서 확인하겠습니다.”
대표는 웃었다.
“그렇게 하면 공사비가 더 올라갑니다.”
“올라가는 비용도 기록하면 됩니다.” 해인이 말했다.
재호가 주민들 앞에서 조건을 읽었다. 선급금 20만 원, 새 부품과 재사용 부품의 분리 표기, 영수증 공개, 주민 입회, 계약서 원본 반출 금지, 추가 비용 발생 시 사전 동의. 대표는 한 조항씩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저희를 못 믿겠다는 겁니까?”
“서로 믿기 전에 확인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자는 겁니다.”
해인은 원본 계약서 대신 주민 공동 서명을 보증으로 제시했다. 대표는 한참 동안 펜을 굴렸다. 결국 선급금 20만 원을 받고 조건부 공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서명란에는 재호와 해인의 이름뿐 아니라 미경, 수완, 도윤의 이름도 들어갔다.
장미경은 마지막 줄을 읽다가 말했다.
“간식비는 공사비에서 빼 주세요. 이건 제 장사 비용이에요.”
대표가 처음으로 웃었다.
“그 조항까지 넣습니까?”
“나중에 제 과자 먹고 비용을 안 내면 분쟁이 커집니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 재호는 부족한 41만 원을 자신이 빌리겠다고 했다. 해인이 즉시 고개를 들었다.
“또 재호 씨가 빚을 져요?”
“제가 관리 책임을 맡았으니까요.”
“그 책임을 혼자 가져가면 우리가 다시 빚지게 됩니다.”
주민들은 각자 부담액을 적었다. 누군가는 2만 원, 누군가는 5만 원만 낼 수 있었다. 재호는 자기 몫을 늘리려 했지만 해인이 그 줄을 막았다.
“공동 계약이면 공동 부담이에요.”
벽을 뜯자 낡은 배관과 임시 호스가 드러났다. 202호 보일러와 302호 팬의 회로가 한 점검구 안에서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대표는 공사가 오래된 건물에서 흔히 생기는 문제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누군가 여러 번 방향을 바꾼 호스 자국은 새로웠다.
점검구 안쪽에서 202호 열쇠 하나가 나왔다. 열쇠 고리에 젖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다음 방.
수완이 사진을 찍는 사이 재호는 벽 뒤에서 또 다른 봉투를 발견했다. 안에는 장미경의 이름이 적힌 증인란 사본이 있었다. 장미경은 종이를 보자 입술을 다물었다.
“제가 서명한 적은 없어요.”
“그럼 왜 이름이 있죠?” 도윤이 물었다.
“작년 겨울에 서기철이라는 사람이 고지서를 받아 달라고 했어요. 봉투를 받은 적은 있습니다. 서명을 한 건 아닙니다.”
재호는 계약서를 봉인했다.
“말 한마디가 서명으로 바뀐 겁니다.”
빠른집 대표는 계약서 분쟁이 생기면 공사를 중단하겠다고 했지만, 주민들은 원본을 넘기지 않고 공동 서명을 추가했다. 대표는 불만을 품은 채 다시 벽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후가 되자 물결세탁소에서 전화가 왔다. 앞선 사건에서 확인한 영수증의 주소였다. 재호와 해인은 작업을 잠시 멈추고 세탁소로 갔다. 가장 안쪽 기계 옆에서 장미경이 봉투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돈, 제가 받은 적이 있어요.”
봉투 안에는 현금이 없고 작은 열쇠만 들어 있었다. 열쇠에는 다음 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세탁소 주인은 마지막 기계의 고장 난 필터를 빼 보라고 했다. 안쪽에서 젖은 종이 한 장이 나왔다.
302호 계약서 사본이었다. 한 장에는 한재호의 이름이, 다른 한 장에는 서해인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두 문서는 같은 날짜를 가리키지만 서명 위치와 도장이 달랐다.
해인이 사본을 만지지 못하고 서 있었다.
“이건 우리가 공동 책임자로 서명한 문서가 아니에요.”
재호는 문장 아래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공동 책임자는 한 명이 아니지만, 청구서는 한 사람에게 먼저 간다.
세탁소 안의 기계들이 차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이 유리창에 부딪혔다. 재호의 휴대전화에 면접 시작 시각을 알리는 문자가 떠 있었다. 이미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해인이 그 화면을 보았다.
“면접을 놓쳤네요.”
“네.”
“제 탓으로 만들지 마요.”
“당신 탓이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생각할까 봐요.”
재호는 젖은 계약서 사본을 파일에 넣었다.
“제가 선택한 비용입니다.”
해인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사본을 들고 먼저 세탁소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재호에게 남아 달라고 하지 않았고, 재호도 면접을 놓친 이유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맨션으로 돌아오자 빠른집 대표의 전화가 와 있었다. 공사 중단을 알리는 말이었다.
“302호 바닥에서 물이 다시 올라옵니다. 이번엔 배관보다 계약서 봉투 안쪽에서 먼저 젖었어요.”
재호는 관리실로 뛰어갔다. 바닥에는 이미 물이 얇게 번져 있었고, 젖은 원본 계약서 봉투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해인은 주민들을 불렀다. 미경은 수건을 들고 왔고, 수완은 사진부터 찍었다.
“원본을 말리면 글씨가 번질 수 있어요.”
“그럼 물에 둔 채로 둘 수도 없잖아요.”
“서로 다른 각도에서 찍고, 누구도 혼자 옮기지 맙시다.”
재호와 해인은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봉투를 들어 올렸다. 물은 배관을 타고 온 것이 아니라 점검구 안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수성못 산책로와 어린 해인, 그리고 얼굴이 흐려진 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가 들고 있는 영수증에 한재호라는 이름이 희미하게 보였다.
해인은 사진을 보자 숨을 멈췄다.
“이건… 2019년 사진이에요.”
재호는 사진 속 아이를 오래 바라보았다. 기억나는 장면은 없었다. 다만 사진 뒷면에 적힌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오면 문을 열어 줄 것.
빠른집 대표는 젖은 계약서를 보며 공사를 계속하려면 추가 비용 18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주민들이 말을 잃은 사이, 해인은 외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린 뒤 상대가 받았다.
“302호를 누가 쓰고 있는지 알고 계세요?”
전화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방은 이미 정리된 방이다.”
“누구에게요?”
“8월 29일 점검이 끝나면 알게 될 거다.”
통화가 끊겼다. 해인은 손에 든 사진을 재호에게 바로 보여 주지 않고 주민 장부 사이에 끼웠다. 재호는 그 행동을 보았지만 묻지 않았다.
그날 저녁, 관리실 게시판에 새로운 공지가 붙었다. 추가 비용과 계약서 사본, 서명 도용 의혹, 수리 재개 조건을 주민들이 함께 확인한다는 내용이었다. 빠른집 대표는 다음 날 오전까지 공동 계약서를 다시 작성하자고 했다.
재호는 물에 젖은 원본을 투명 상자에 넣었다. 해인은 사진이 들어간 장부를 품에 안았다. 둘은 다시 관리실 책상 앞에 앉았지만, 서로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바닥 틈에서 물 한 방울이 올라와 계약서 상자의 모서리를 적셨다. 재호가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내일은 비용부터 공개하죠.”
해인이 장부를 닫았다.
“그리고 외삼촌에게 들은 말을 주민들 앞에서 그대로 말할게요.”
복도등이 늦게 켜졌다. 3층 불빛이 들어온 순간 302호 문 아래로 봉투 하나가 미끄러져 나왔다. 봉투 겉면에는 안전 점검 8월 29일 오전 9시라고 적혀 있었다. 해인이 봉투를 주웠고, 재호는 주민들을 부르기 위해 현관으로 달려갔다. 두 번째 계약서의 젖은 사본이 책상 위에서 천천히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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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 시각: 2026-08-20T09:23:20+09:00
MOBOT 세계관 변환 근거
- 안전과 재활을 위한 장비를 공공기관에 기증한 사건: 행사 수익을 주민들이 직접 정산하는 장면에 사용했다. - 재활을 돕는 장비가 여러 동작을 지원한다는 관찰: 행사 뒤 실제 청구서가 남는 구조에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