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08
장부에 이름을 올리는 법
지산맨션에는 빈방이 없다
점검자는 현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민 입회 명단과 촬영 동의서를 확인했다. 매수자 대리인은 뒤에서 시계를 보며 302호 열쇠를 요구했다. 재호는 열쇠를 내놓지 않고 출입표 첫 줄에 시간을 적었다.
8월 29일 오전 9시 3분. 점검자 1명, 매수자 대리인 1명, 주민 5명.
“기록을 먼저 하는 이유가 뭡니까?” 대리인이 물었다.
“나중에 누가 무엇을 봤는지 다투지 않으려고요.”
“저희는 건물을 평가하러 왔습니다.”
해인이 말했다.
“그 평가가 거주자를 지우는 방식이면 주민들이 확인할 권리가 있습니다.”
점검자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302호로 향했다. 도윤은 앞장서서 출입 규칙을 읽었고, 미경은 점검자가 신발을 벗어야 하는지 물었다.
“안전 점검인데 바닥에 흙을 묻히면 수리비가 또 생겨요.”
점검자는 당황했지만 신발 덮개를 꺼냈다. 수완은 그 장면까지 촬영했다.
302호 문을 열자 전날 밤의 습기가 아직 바닥에 남아 있었다. 빠른집 대표가 설치한 송풍기는 벽 쪽을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전기 팬은 분리되어 있었지만, 점검구 안쪽에서 낮은 떨림이 계속됐다.
점검자는 바닥 수분을 측정하고 배관 압력을 확인했다. 안전 항목에는 전기 분리, 배관 압력, 누수 잔여, 환기 상태가 적혔다. 거주 항목에는 개인 물품, 출입 흔적, 우편물, 사용자의 동의가 적혔다.
“302호를 비우지 않으면 안전 항목과 거주 항목 모두 불합격 처리될 수 있습니다.” 매수자 대리인이 말했다.
재호는 그를 돌아보았다.
“안전 위험이 있으면 고치면 됩니다. 누가 살았는지를 이유로 위험 판정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방 안의 물건이 위험을 확인하기 어렵게 합니다.”
“그럼 물건을 치우기 전에 소유자와 사용자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점검자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기록지를 수정했다. 안전과 거주를 별도 항목으로 나누었다. 대리인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점검자는 평가 절차상 필요한 구분이라고 설명했다.
점검구를 열자 낡은 휴대전화가 하나 나왔다. 케이스는 갈라져 있었고, 뒷면에 2019년 8월 29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재호가 장갑을 끼고 전원을 연결하자 화면이 한 번 깜빡였다.
해인이 숨을 들이켰다.
재생된 음성은 잡음이 많았다. 어린 해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이 방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네가 다시 올 때까지.”
잠시 뒤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내 이름이 계약서에 들어가면 나는 여기 사람이 되는 거야?”
“응. 그러면 아무도 널 못 내보내.”
“그럼 네 이름도 같이 써 줘.”
재호는 벽에 손을 짚었다. 목소리의 끝에 자신의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짧은 웃음과, 문을 여는 금속음.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매수자 대리인이 휴대전화를 가리켰다.
“사적인 녹음입니다. 평가 자료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수완이 말했다.
“법적 효력을 판단하는 게 아닙니다. 이 기기가 있었고, 이 음성이 재생됐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겁니다.”
점검자는 녹음의 법적 판단은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발견 위치와 기기 상태를 점검표에 적었다. 재호는 목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묻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믿고 싶은 것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해인은 주민들 앞에서 사진 봉투를 꺼냈다. 수성못에서 어린 자신과 얼굴이 흐려진 아이가 찍힌 사진이었다. 영수증에는 한재호라는 이름이 남아 있었다.
“이 사진을 어제 봤습니다. 재호 씨에게 바로 보여 주지 않았어요.”
재호는 사진을 받지 않고 장부 위에 놓았다.
“왜 숨겼습니까?”
“확실하지 않았어요. 내가 기억하는 아이와 이 사진 속 아이가 같은 사람인지, 재호 씨가 정말 그때 함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주민들 앞에 먼저 내놓은 겁니까?”
“이번에는 혼자 판단하지 않으려고요.”
그 말은 해인의 사과보다 무거웠다. 재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억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점검자는 302호의 전기 팬을 완전히 분리하고, 배관 보완 작업을 확인했다. 바닥의 잔여 습기는 추가 건조가 필요했고, 그 비용은 18만 원으로 기록됐다. 빠른집 대표는 주민 공동 계약에 따라 먼저 작업하고 나중에 지급받기로 했다.
점검 결과는 보류였다. 전기와 배관의 즉시 위험은 줄었지만, 실제 사용자 확인과 일부 거주 흔적의 출처가 남아 있었다. 매수자 대리인은 계약금 집행을 중단한다고 통보했다.
“평가액도 다시 산정해야 합니다.”
해인은 물었다.
“주민들이 있다는 이유로요?”
“확인되지 않은 사용자가 있고, 소유권 서류가 두 개이며, 안전 점검이 보류됐습니다.”
재호는 그 말을 장부에 적었다. 매수자 대리인은 불쾌해했지만 더 이상 기록을 막지 못했다.
점검이 끝난 뒤 주민들은 복도에 앉아 주민협약을 수정했다. 안전 위험은 즉시 수리하되, 수리 과정에서 거주자의 물건과 기록을 임의로 옮기지 않는다. 외부 점검은 주민 입회와 공개 기록을 전제로 한다. 안전 판정과 거주권 판단을 분리한다.
미경은 간식 정산 조항을 넣자고 주장했다.
“안전해도 배고프면 회의가 길어져요.”
도윤은 그 조항을 진지하게 받아 적었다. 수완은 7개 조항을 번호 매겼다. 아직 최종 협약은 아니었지만, 외부 점검자가 주민들의 기록을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해인은 외삼촌에게 다시 전화했다. 이번에는 주민들이 모두 듣는 자리였다.
“매수자와 이미 합의했습니까?”
외삼촌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 건물은 네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 주민들에게 직접 말하세요.”
“302호를 비우면 문제는 끝난다.”
“사람을 비우는 게 문제를 끝내는 방법이라면, 저는 그 계약에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해인은 전화를 끊었다. 외삼촌과 가족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더 이상 혼자 맡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주민들은 공개 장부를 관리실 한가운데에 펼쳤다. 7월 31일 세탁기, 8월 20일 공고, 8월 24일 행사, 8월 25일 공동 계약, 8월 29일 안전 점검 보류. 돈과 출입과 수리 실패가 같은 장부에 연결되었다.
장부 뒤쪽에서 검은 표지의 기록이 발견됐다. 302호와 202호, 옥상, 물결세탁소를 오간 흔적이 날짜별로 적혀 있었다. 마지막 줄에는 관리인에게 서류 전달 실패라고 적혀 있었다. 날짜는 재호가 서울 면접을 보러 가기로 했던 날이었다.
재호는 그 문장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해인은 사진을 장부 뒤에 넣었다. 그녀는 아직 재호가 그때 무엇을 했는지 말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매수자 대리인이 다시 전화했다.
“내일까지 302호를 비우지 않으면 주민협약을 불법 점거로 고발하겠습니다.”
재호는 스피커폰을 켰다.
“그 고발도 기록하겠습니다.”
“기록이 법을 대신하지는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률 상담을 받겠습니다.”
“공동기금으로요?”
장미경이 옆에서 말했다.
“네. 간식보다 먼저요.”
대리인은 전화를 끊었다. 주민들은 웃지 못했지만, 미경의 말 덕분에 숨을 조금 돌릴 수 있었다.
밤늦게 302호 문 아래로 새 봉투가 들어왔다. 봉투에는 방을 열어 달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재호가 봉투를 열자 안에는 낡은 명함과 작은 쪽지가 있었다.
당신은 2019년에 이 방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도망가지 마세요.
명함에는 이름이 없고, 지하 창고의 위치만 표시되어 있었다. 해인은 재호 옆에 섰다.
“지하로 내려가요.”
“주민 두 명 이상 입회 규칙이 있어요.”
“그럼 모두 부르죠.”
재호는 관리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하 창고로 가자고 알렸다. 수완은 새 봉투를 촬영했고, 도윤은 출입표를 만들었다. 미경은 장부를 챙기며 말했다.
“지하에서도 누가 간식 먹으면 반드시 적어요.”
복도등이 1층부터 켜졌다. 3층 불빛은 가장 늦게 들어왔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불안해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창고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안쪽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재호가 문 앞에서 멈췄다.
“안에 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해인이 손전등을 켰다.
“이번에는 같이 열어요.”
재호는 주민 명단에 마지막 입회자 이름을 적고 창고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문 안쪽에서 누군가 낮게 말했다.
“그 장부는 아직 닫지 마세요.”
재호가 문을 열자 검은 장부 수십 권이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가장 앞의 표지에는 소유권 이전 전 주민 확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맨 위 장부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오늘 날짜와 함께 누군가 방금 적은 잉크가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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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 시각: 2026-08-20T09:23:20+09:00
MOBOT 세계관 변환 근거
- 현장 데이터와 운영 경험을 연결하는 전환 전략: 매각 계획과 비용을 공동 장부에 올리는 장면에 사용했다. - 새 성장 동력에 큰 투자와 장기 비용이 필요하다는 기획: 해인의 숨은 심사일을 주민들이 알게 되는 역전에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