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8
삭제할 사람의 이름
지산맨션에는 빈방이 없다
아침 여섯 시 오십 분, 재호는 전날 밤 비워 둔 문장에 이름 두 개를 먼저 적었다.
누가 없애야 하는가.
그 아래에는 서림주거관리와 서울 회사의 주소를 나란히 붙였다. 한쪽은 장비를 들고 왔고, 다른 한쪽은 그 장비가 만든 자료를 검수하겠다고 했다. 둘 다 원자료의 주인은 아니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책임은 늘 빈칸을 좋아했다.
해인이 관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공동 장부와 식은 김밥 두 줄이 들려 있었다.
“아침부터 협박장 써요?”
“질문장입니다.”
“질문이 두 회사로 가면 협박처럼 보이죠.”
“협박은 답을 안 해도 되는데, 이건 답을 안 하면 다음 단계가 생겨요.”
재호는 전날 장부의 마지막 줄을 펼쳤다. 입구 장비는 7시 12분부터 8시까지 켜졌다. 두 대는 설치되지 않았다. 수집 항목과 보관 기간과 삭제 책임자는 제출되지 않았다. 그 문장 뒤에 새 줄을 붙였다.
입구 장비가 저장한 자료의 항목·보관 위치·삭제 담당자를 9월 8일 오전 열 시까지 서면으로 확인할 것.
해인이 김밥을 내려놓았다.
“서울 회사에도 보내면 자료를 받으러 올 텐데요.”
“받으러 오지 못하게 하려고 보내는 겁니다.”
그는 문장을 두 통의 메일로 복사했다. 서림주거관리에는 원자료의 보관과 삭제를 담당하는 주체를 지정하라고 썼고, 서울 회사에는 현장 요약만 제공하며 원자료 수령·복제·검수 편입을 거부한다고 썼다. 마지막 문장은 같았다. 책임자 없는 자료는 누구의 성과로도 이전되지 않는다.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휴대전화가 울렸다. 박성문이었다.
“아침부터 양쪽에 같은 문장을 보내시면 협의가 어려워집니다.”
“어제 양쪽이 같은 장비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현장 자료는 운영사가 관리합니다.”
“운영사가 누구죠?”
“서림주거관리입니다.”
“그럼 삭제 책임자도 서림주거관리입니까?”
전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재호는 그 침묵을 장부에 적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해인이 고개를 저었다. 침묵은 기록할 수 있어도 상대의 서명은 아니었다.
“자료가 어디에 있습니까?” 재호가 물었다.
“현장 장비와 운영 서버에 있습니다.”
“서버 주소와 접근 담당자는요?”
“보안상 현장에서 공개할 수 없습니다.”
“그럼 오늘 협의에 보안 담당자를 보내세요.”
“협의는 사업 범위를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사업 범위 안에 삭제가 없으면, 어제 건은 사업이 아니었습니까?”
박성문은 전화를 끊었다. 재호는 김밥 한 줄을 해인에게 밀었다.
“먹어요. 책임자는 안 와도 밥은 와 있네요.”
열 시가 되기 전, 서울 회사의 검수 담당자인 윤정민이 화상회의 화면에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유리벽과 식물이 있었고, 식물은 관리비를 걱정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박성문은 관리실 회의 테이블에 앉았고, 최경태는 문 옆에 서 있었다. 회사 로고가 붙은 조끼 대신 어제의 회색 조끼를 입고 있었지만, 주민협약 글자는 더 비뚤어져 있었다.
수완이 서류 세 장을 펼쳤다. 첫 장은 장비 설치 기록, 둘째는 업체 확인서, 셋째는 서울 회사의 자료 요청 메시지였다.
윤정민이 먼저 말했다.
“서울 회사는 원자료를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검수 대기 업무에 필요한 현장 요약과 자료 목록을 요청했을 뿐입니다.”
“자료 목록에 주민 장부와 장비 기록을 묶으셨죠.” 재호가 말했다.
“목록은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겁니다.”
“존재 여부를 확인한 뒤에는요?”
“그건 협의 사안입니다.”
“협의가 끝날 때까지 누가 복제하지 않는다는 보장은요?”
윤정민은 화면 밖을 보았다. 서울에서는 누군가 다른 창을 열고 있을 때 자주 생기는 표정이었다.
박성문이 끼어들었다.
“서울 회사는 기술 검수만 합니다. 자료의 법적 처리는 운영사 몫입니다.”
윤정민이 곧장 반박했다.
“운영사가 제공한 자료를 검수하는 건 우리 업무입니다. 자료가 어떤 범위로 수집됐는지는 현장 운영사가 보증해야 합니다.”
두 사람의 말이 회의실 가운데서 부딪혔다. 장비는 치워졌는데도, 기계가 남긴 자동문 같은 소리가 났다.
수완이 물었다.
“그럼 둘 중 한 분은 자료를 보관하고, 다른 분은 자료를 검수합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해인이 장부를 닫았다.
“주민협약은 오늘부터 동의를 두 가지로 나눕니다. 어제 장비를 잠깐 켜는 데 대한 현장 입회와, 그 자료를 계속 보관하고 다른 회사에 넘기는 데 대한 처리 동의는 다릅니다.”
박성문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렇게 나누면 실증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가능하지 않은 건 실증이 아니라 책임 없는 실증이겠죠.”
“주민협약이 사업 운영에 조건을 붙일 권한은 없습니다.”
“그럼 주민의 차량과 얼굴을 향한 장비를 켤 권한도 없었겠네요.”
미경이 계산기를 탁자 위에 올렸다.
“참고로 책임자가 한 명 늘 때마다 회의 시간이 삼십 분씩 늘어요. 오늘은 네 명이니 두 시간은 청구해야 합니다.”
윤정민이 처음으로 웃었다.
“그 비용은 누가 부담합니까?”
“자료를 만든 쪽이요. 아직 이름을 못 정했으니 반반으로 청구하죠.”
웃음은 짧았고, 박성문은 웃지 않았다.
그때 최경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정기 점검 담당자의 문자였다. 다음 주 배정은 보류 상태이며, 현장 협조 확인서가 정리될 때까지 재배정이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최경태는 화면을 재호에게 보여 주지 않고 해인에게만 내밀었다. 해인은 읽은 뒤 장부에 적으려 했다.
최경태가 막았다.
“제 배정 문자는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왜요?” 재호가 물었다.
“회사와 주민 사이의 자료가 되는 순간, 제가 또 자료의 주인이 아닌 사람이 됩니다.”
그 말은 어제와 달랐다. 최경태는 이번에는 자기 손실을 주민들의 증거로 자동 변환하지 않았다. 재호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럼 손실은 본인이 말할 때만 기록합시다.”
최경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인은 공동 장부의 별도 칸에 ‘작업자 본인 보관, 제출 여부 미정’이라고만 적었다.
선택지가 두 번째로 좁아졌다. 최경태의 생계 손실을 협상 카드로 쓰거나, 그의 자율성을 지키느라 당장의 압박을 포기해야 했다. 재호는 후자를 택했다. 사람의 손실까지 원자료로 만들면 주민협약은 업체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게 된다.
정민이 화면을 다시 보며 말했다.
“저희는 오늘 원자료를 받지 않겠습니다. 다만 검수 범위가 축소되면 9월 8일 이후 재호 씨의 계약은 기존 문서 검수 대기 범위로만 유지됩니다.”
재호는 이미 알고 있던 말을 새로 들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서울행은 다시 좁아졌다. 현장 자료를 건네면 배치 가능성이 열리지만, 건네는 순간 주민들이 막아 둔 문이 그의 손으로 열렸다.
해인이 그를 보았다.
“결정은 당신이 해요.”
“제가 결정하면 주민협약이 제 경력 때문에 움직였다고 쓰일 텐데요.”
“그래서 조건을 같이 정하고, 선택은 당신이 하죠.”
재호는 윤정민을 향해 말했다.
“현장 요약은 오늘 보내겠습니다. 원자료 목록은 존재 항목만 확인하되, 파일·복사본·접근 권한은 받지 않겠습니다. 이 조건을 계약 부속 문서로 남겨 주세요.”
“그러면 현장 검수 업무는 제외됩니다.”
“그 범위는 이미 제외됐습니다.”
“서울에서 다시 일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있습니다. 그래서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문장을 고르는 겁니다.”
정민은 잠시 침묵하다가 회의록 초안을 화면에 띄웠다. 서울 회사는 현장 원자료를 수령하지 않고, 주민협약 공개 기록에 기초한 요약만 검수한다. 재호의 계약은 문서 검수 대기로 유지한다. 현장 자료가 별도 동의 없이 이전될 경우 검수 범위에서 제외한다.
박성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림주거관리도 같은 문구에 서명하라는 겁니까?”
“아니요.” 해인이 말했다. “당신들은 다른 문구에 서명해야 합니다.”
그녀는 새 종이를 내밀었다. 9월 7일 입구 장비의 저장 자료는 장비 내부 임시 저장분, 운영 서버 전송분, 외부 보안업체 백업분으로 나누어 목록을 제출한다. 서림주거관리는 주민에게 자료 처리의 대표 책임자로 통지한다. 삭제 요청 접수 후 각 보관 위치의 삭제 확인서를 제출한다. 서울 회사는 해당 자료를 수령·복제하지 않는다.
박성문이 종이를 읽으며 말했다.
“외부 보안업체는 저희가 직접 지휘하지 않습니다.”
“그럼 지휘하지 않은 업체에 자료를 보낸 쪽의 이름을 적으세요.”
“백업 여부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확인하고 서명하세요.”
“오늘 바로는 어렵습니다.”
“그럼 오늘 측정의 책임자도 아직 없는 겁니다.”
그 순간 도윤이 관리실 밖에서 호루라기를 두 번 불었다. 주민들이 복도에 모였다. 경기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삭제 담당자를 부르는 신호는 정확했다.
도윤이 문틈으로 말했다.
“호루라기는 잘 부는데요. 담당자는 아직 안 왔습니다.”
박성문이 그를 노려보았다.
“이건 협의 방해입니다.”
“방해가 아니라 호출입니다. 방해는 보통 호출할 사람도 없어요.”
회의실 안의 공기가 좁아졌다. 박성문은 결국 첫 줄에 서명했다. 서림주거관리가 9월 7일 장비 운영과 자료 처리의 주민 상대 책임 주체가 된다는 문장, 단 외부 백업 여부와 삭제 완료는 확인 후 제출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책임이 처음으로 회사 이름 아래 내려앉았다.
해인은 서명본을 두 부로 나누었다. 한 부는 주민협약 장부 뒤에 넣고, 다른 한 부는 박성문에게 건넸다.
“이제 자료를 지우세요.”
박성문이 고개를 들었다.
“삭제 요청을 받았다고 해서 즉시 삭제할 수는 없습니다. 보존 의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재호가 말했다.
“그 의무의 근거를 내일까지 제출하세요. 근거가 없으면 삭제 확인서를 내고요.”
“내일까지요?”
“장비는 한 시간도 안 돼서 기록을 만들었습니다.”
미경이 계산기를 다시 눌렀다.
“삭제 확인 지연료는 시간당 삼천 원입니다.”
“그런 비용표는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만들었어요. 첫 청구 대상은 박 팀장님입니다.”
박성문은 서명한 종이를 접지 않고 그대로 들고 나갔다. 문밖에서 그의 구두가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장비가 있던 자리의 네모난 먼지 자국을 밟지 않으려는 듯, 한 번 크게 돌아갔다.
오후 네 시, 서울 회사에서 회의록 부속 문서가 도착했다. 재호의 계약은 유지되었지만 현장 검수 배치는 제외되었다. 서울은 자료를 받지 않는 대신 현장 책임 판단도 하지 않겠다고 적었다. 한 문을 지키자 다른 문이 닫혔다.
해인이 화면을 보며 물었다.
“후회해요?”
“조금요.”
“정직하네요.”
“후회가 없으면 다음 선택이 쉬워져서 위험하잖아요.”
“그럼 서울은요?”
“문서 검수 대기. 이름은 남았고, 현장은 멀어졌어요.”
해인은 대답하지 않고 관리실 창문을 열었다. 저녁 공기가 들어오며 어제 삼각대가 서 있던 자국의 먼지를 흔들었다. 도윤은 바닥에 호루라기를 내려놓고 주차면마다 종이 표식을 붙였다. 측정 대상 아님. 주민 통행 중. 삭제 확인 대기.
재호는 마지막 표식 앞에 섰다. 사람보다 먼저 도착한 숫자는 이제 사람보다 늦게 지워져야 했다. 그 순서를 바꾼 것은 주민들의 동의가 아니라, 책임자의 이름을 요구한 한 장의 문서였다.
해인이 옆에 서서 말했다.
“내일은 외부 보안업체에 직접 연락해야겠네요.”
“박성문이 확인서를 가져오면요.”
“가져오지 않으면요?”
재호는 서명본의 단서 문장을 가리켰다.
“가져오게 만들 조건을 다시 쓰죠. 이번엔 회사가 아니라 보관 장소를 상대로.”
복도등이 입구부터 하나씩 켜졌다. 관리실 앞 두 번째 등이 켜질 때, 재호의 휴대전화에 박성문의 짧은 문자가 도착했다.
외부 백업 존재 여부 확인 중. 내일 오전까지 회신.
약속도 아니고 거절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보류가 이름을 가진 회사의 문장 아래 있었다. 재호는 그 문자를 장부에 옮겨 적지 않았다. 박성문 본인에게 원문을 보관하라고 답장한 뒤, 해인과 주민들에게는 화면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왜 장부에는 안 써요?” 수완이 물었다.
“아직 사실은 백업 여부가 아니라 확인 중이라는 답변뿐이니까요.”
수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류 칸에 넣죠.”
재호는 빈칸 하나를 만들었다. 보관 장소 미확정. 삭제 확인 미제출. 다음 확인 시각 9월 9일 오전.
이번에는 빈칸이 책임을 숨기지 않았다. 내일 누군가 그 칸을 채우러 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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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 시각: 2026-08-21T15:30:00+09:00
MOBOT 세계관 변환 근거
- 해외 생산 현장에 단계적으로 투입될 예정인 신형 작업 장비에 관한 산업 보도: 계획된 도입을 먼저 작은 현장에 투입하고, 그 결과를 확장 근거로 삼으려는 압력을 이번 회차의 장비 원자료 협상으로 변용했다. - 공연과 시연을 넘어 실제 산업 현장 투입을 검증하려는 개발 과정에 관한 보도: 보여 준 작동 장면과 실제 사용 조건이 다를 수 있다는 긴장을, 장비가 켜졌다는 사실과 동의가 있었다는 문장을 분리하는 장면에 사용했다. - 차량과 제조 현장의 AI 활용 확대를 아직 확정하지 못한 탐색 기록: 확정되지 않은 탐색 결과를 삭제 책임의 공백으로 변환해, 모른다는 사실이 실제 행동을 강제하도록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