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9

백업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지산맨션에는 빈방이 없다

9월 9일 오전 8시 47분, 재호는 전날 만든 빈칸을 먼저 펼쳤다.

보관 장소 미확정. 삭제 확인 미제출. 다음 확인 시각 9월 9일 오전.

해인은 이미 외부 보안업체의 대표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약속한 오전 열 시보다 한 시간 십삼 분 이른 전화였다.

“아직 업무 시작 전이라고 하면요?”

“그럼 업무 시작 전부터 자료를 들고 있었다고 기록하면 되죠.”

“그런 기록은 누가 책임져요?”

“전화 건 사람이요.”

해인은 스피커를 켰다. 세 번의 연결음 뒤에 자동 안내가 나왔다. 상담원은 보안상 고객사 이름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재호는 서명본의 첫 줄을 읽었다. 9월 7일 입구 장비 운영과 자료 처리의 주민 상대 책임 주체는 서림주거관리. 그리고 두 번째 줄을 덧붙였다.

“서림주거관리의 외부 백업 보관 장소입니다. 백업 존재 여부와 삭제 가능 여부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상담원은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해인은 벽시계를 보았고, 미경은 계산기를 꺼냈다.

“이른 전화 비용은요?” 수완이 물었다.

“통화료는 무료입니다.” 미경이 말했다. “대신 책임자 연결 대기료가 있어요.”

“누구에게 청구해요?”

“연결된 사람에게요. 아직 연결이 안 됐으니 우리 모두가 조금씩 부담하죠.”

재호는 웃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의 대기 음악이 너무 밝았다. 사람의 얼굴을 지우는 장비와 어울리는 음악은 대개 밝았다.

9시 2분, 한미수라는 여자가 연결됐다. 그녀는 자신을 청명보안 재해복구 운영 담당이라고 소개했다. 화면은 켜지지 않았고, 목소리만 관리실 천장에 퍼졌다.

“저희는 서림주거관리의 운영 서버를 대신 관리할 뿐입니다. 주민 자료의 처리 책임자는 아닙니다.”

해인이 바로 물었다.

“백업은 있습니까?”

“계약상 보관 대상은 있습니다.”

“그게 백업이 있다는 뜻입니까?”

한미수는 문장을 고쳤다.

“9월 7일 입구 장비에서 전송된 보관 묶음이 하나 있습니다.”

관리실 안의 펜들이 동시에 멈췄다. 수완은 장부의 보류 칸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원자료입니까?” 재호가 물었다.

“복구용 스냅샷입니다.”

“복구하면 원자료가 나옵니까?”

“복구 가능한 항목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무엇이 포함됩니까?”

“장비 작동 시각, 이벤트 이미지, 차량 식별 정보가 포함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해인이 숨을 들이켰다. 승인되지 않은 식별 정보가 실제로 저장됐는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복구 가능한 보관 묶음 안에 포함될 가능성은 확인됐다. 모른다는 말이 이번에는 정지 버튼이 아니었다. 삭제 절차를 시작할 근거가 됐다.

재호가 물었다.

“삭제 요청은 접수됐습니까?”

“8일 오후 운영 서버와 장비 내부 임시 저장분에 대한 요청은 접수됐습니다.”

“외부 백업은요?”

“외부 백업에 대한 직접 삭제 요청은 없습니다.”

그때 관리실 문이 열렸다. 박성문이 서류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양복 재킷은 입었지만 넥타이는 없었다. 책임자가 된 사람의 옷차림이라기보다, 책임자가 되기 직전 도망치려던 사람의 옷차림이었다.

“직접 연락하시면 계약상 절차가 꼬입니다.”

해인이 그를 보았다.

“어제는 외부 백업 여부를 오늘 오전까지 확인한다고 하셨죠.”

“확인 중입니다.”

“확인됐습니다.” 재호가 말했다. “청명보안에 보관 묶음이 있습니다.”

박성문은 한미수에게 물었다.

“그걸 백업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까?”

“계약서에는 재해복구용 보관 묶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원자료는 아닙니다.”

“복구 시 원자료에 준하는 항목이 나올 수 있습니다.”

박성문은 재호를 향해 손바닥을 폈다.

“이런 표현이 문제입니다. 복구 가능성과 실제 저장은 다릅니다.”

“그래서 저장 항목 목록을 요구하는 겁니다.”

“보존 의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의 의무입니까?”

“회사 법무 검토가 필요합니다.”

“사건번호가 있습니까? 기관 요청이 있습니까? 보존 기간이 적힌 문서가 있습니까?”

박성문은 서류봉투에서 한 장을 꺼냈다. 내부 메모였다. 분쟁 발생 가능성에 대비해 관련 데이터를 일정 기간 보존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작성자 서명은 없었고, 적용 대상과 기간도 비어 있었다.

미경이 메모를 받아 계산기 옆에 놓았다.

“이건 보존 의무가 아니라 보존하고 싶다는 의견이네요.”

“법무 검토 전 임시 문서입니다.”

“임시 문서는 삭제 확인서보다 오래 사네요.”

한미수가 끼어들었다.

“저희 쪽 계약에는 별도 항목이 있습니다. 장애 분석과 운영 개선을 위해 보관 묶음을 삼십 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재호는 그 문장을 듣고 장부를 덮었다. 자료가 단순히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게 아니었다. 실증의 결과를 다음 장비와 다음 현장의 개선에 쓰기 위한 보관이었다. 주민들은 현장 입회를 허용했지만, 주민의 차량과 얼굴을 품질 개선 재료로 쓰는 데 동의한 적은 없었다.

해인이 박성문에게 말했다.

“그 항목을 주민에게 설명했습니까?”

“운영 개선은 일반적인 처리 범위입니다.”

“일반적인 범위라는 말로 얼굴이 일반인이 되지는 않아요.”

박성문은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전부 지우면 회사가 자료를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회사는 확인하고 싶고, 주민은 지우고 싶습니다.” 재호가 말했다. “그 사이에서 누가 결정합니까?”

“운영 책임자는 저희입니다.”

“그럼 삭제 명령도 저희가 아니라 당신들이 직접 내리세요.”

“외부 업체는 저희 지시를 받아 움직입니다.”

한미수가 다시 말했다.

“삭제 요청은 계약 계정 소유자의 인증이 필요합니다. 주민협약만으로는 접수할 수 없습니다.”

선택지가 좁아졌다. 주민들이 보안업체에 직접 삭제를 요구하면 대표권을 증명해야 했다. 박성문을 통해 요구하면 외부 백업은 다시 운영사의 말 속에 묻힌다. 재호는 해인을 보았다.

“대표자 이름을 올리면, 다음부터 업체가 당신에게 직접 답합니다.”

“알아요.”

“틀린 요구로 판단되면 비용도 당신에게 먼저 올 겁니다.”

“그것도 알아요.”

해인은 주민협약의 대표 처리 책임자라는 기존 서명을 옆으로 밀었다. 새 종이를 꺼내 한 줄을 썼다.

외부 보안업체 보관 자료에 대한 삭제 요청과 확인 수령의 주민 대표는 서해인으로 한다. 단, 주민협약은 원자료의 복구·복제·재사용에 동의하지 않는다.

박성문이 말했다.

“그렇게 되면 회사의 지시권을 침해합니다.”

“지시권은 가지세요. 삭제 확인은 우리에게 보내세요.”

“두 주체가 동시에 요구하면 처리가 지연됩니다.”

“그래서 오늘 두 주체의 요구를 하나로 맞추는 겁니다.” 재호가 말했다. “원자료는 즉시 복구 금지. 품질 개선용 사용 금지. 개인을 식별하지 않는 최소 운영 로그만 검증 목적으로 남김. 나머지는 삭제 절차에 넣기.”

박성문이 웃음 비슷한 것을 흘렸다.

“주민이 보관 범위를 설계하시게요?”

“어제 회사들이 책임 범위를 설계하지 못해서요.”

한미수는 잠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화면 공유를 시작하자 작은 창 하나가 떴다. 보관 묶음 생성 시각, 장비 전송 기록, 복구 차단 상태. 원자료 화면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보관 묶음의 상태가 존재로 표시되어 있었다.

수완이 물었다.

“저 화면을 캡처해도 됩니까?”

“화면 캡처는 가능합니다. 파일 자체는 제공할 수 없습니다.”

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 회사에 넘길 요약은 화면의 상태와 주민협약의 문장으로만 만들 수 있었다. 원자료를 받지 않는다는 선택이 이번에는 경력의 문제가 아니라, 보관 업체와 주민 사이의 경계가 됐다.

11시 26분, 청명보안은 해인의 이름으로 직접 삭제 요청을 접수했다. 박성문은 외부 백업의 보관 묶음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내부 메모 외에 별도 보존 근거를 제출하지 못했다. 한미수는 원자료 복구 기능을 즉시 잠그고 품질 개선 항목의 사용을 중지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완전 삭제는 백업 보관 주기의 확인과 삭제 작업이 끝난 뒤에만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언제 끝납니까?” 해인이 물었다.

“내일 오후 다섯 시까지 1차 삭제 결과를 보내겠습니다.”

“1차 말고 완료 확인서를 주세요.”

“백업 묶음의 삭제 완료 확인은 작업 종료 후 발급됩니다.”

“그럼 작업 종료 시각을 정하세요.”

한미수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9월 10일 오후 다섯 시. 그때까지 복구 차단 상태와 삭제 대상 목록을 유지하고, 완료 확인서를 발급하겠습니다.”

재호는 그 시각을 장부에 적었다. 이번에는 빈칸 옆에 담당자의 이름이 있었다. 한미수. 그리고 수신자 이름이 있었다. 서해인.

박성문은 서류봉투를 닫았다.

“회사 입장에서는 과도한 조치입니다.”

“과도한 건 한 시간 켠 장비가 삼십 일 뒤의 개선 자료가 되는 겁니다.” 해인이 말했다.

“실증에는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사람에게는 삭제가 필요할 때도 있어요.”

점심 무렵 최경태에게 전화가 왔다. 다음 주 정기 점검은 아직 보류였고, 협조 확인서에 외부 보안업체와의 자료 처리 분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가 추가됐다. 그는 스피커폰을 켜지 않은 채 재호에게만 말했다.

“제 이름을 그쪽에 전달해서 빨리 풀어 달라고 하지는 마세요.”

“안 합니다.”

“대신 한 가지는 말해도 됩니다. 저는 그 장비를 켠 사람이지, 백업을 만든 사람이 아닙니다.”

재호는 그 말을 기록하지 않았다. 최경태가 직접 말한 범위 안에서만 장부의 사람 칸에 적었다. 작업자 본인 진술. 제출 여부 본인 결정.

그날 오후 재호에게 서울 회사의 메일이 왔다. 외부 보안업체 화면의 요약과 삭제 요청 문서 검수는 기존 대기 계약에 포함되지 않으며, 별도 검수로 전환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현장 검수 배치도, 이번 문서의 유급 처리도 없었다. 그는 메일을 지우지 않고 인쇄했다. 종이 한 장이 하루치 임금보다 싸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모욕적이었다.

해인이 물었다.

“서울에 보낼 거예요?”

“요약만요. 원자료는 안 보냅니다.”

“또 문 하나 닫히겠네요.”

“이번엔 문이 아니라 창고예요.”

“차이가 있어요?”

“문은 나중에 열 수 있지만, 창고는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면 열었다가 다시 저장할 수 있거든요.”

해인은 잠시 그를 보다가 내용증명 봉투를 밀었다.

“우편료는 제가 낼게요.”

“왜요?”

“제 이름으로 대표했으니까요.”

“공동 장부에 비용 처리하죠.”

“공동기금은 0원이에요.”

미경이 계산기를 들었다.

“그럼 이번엔 대표자 개인 선지출. 다음 회의에서 환급 여부 결정.”

해인은 1만 8천4백 원을 결제했다. 환급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재호는 그 금액을 장부의 돈 칸에 적었다. 해인이 떠안은 비용은 증거가 아니었다. 다만 책임을 실제로 받은 사람에게 붙은 영수증이었다.

저녁 7시가 지나자 복도등이 입구부터 켜졌다. 청명보안에서 추가 문서가 도착했다. 백업 보관 묶음 존재 확인. 복구 차단 완료. 재사용 중지. 삭제 작업 예정. 완료 확인 예정 시각 9월 10일 오후 다섯 시.

하지만 삭제 완료란은 비어 있었다.

수완이 말했다.

“이번 빈칸은 지난번보다 나쁘네요.”

“아니요.” 재호가 말했다. “지난번엔 누가 채워야 하는지 몰랐어요. 지금은 이름과 시간이 있습니다.”

박성문이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보존 의무 근거는 법무 검토 후 별도 회신. 현재 내부 검토 메모 외 확정 문서 없음.

해인은 그 문장을 읽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이제 회사는 아무것도 확정하지 않았다고 말하겠네요.”

“그래서 업체가 확정한 사실만 남겼어요.”

“백업은?”

재호는 장부의 빈칸을 가리켰다.

“있습니다.”

“삭제는?”

“아직 아닙니다.”

그 말은 패배처럼 들리지 않았다. 삭제가 끝났다고 거짓말하는 것보다, 끝나지 않았다고 이름 붙이는 편이 다음 행동을 정확하게 만들었다.

해인이 관리실 문을 잠그려다 손을 멈췄다.

“내일 다섯 시에 확인서가 안 오면요?”

재호는 청명보안의 수신 문서를 접어 장부 뒤에 넣었다.

“그때는 보관 장소가 자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삭제하지 않은 이유를 직접 설명하게 만들죠.”

“이번엔 누구를 부를까요?”

복도 끝에서 도윤이 호루라기를 한 번 불었다. 아주 짧은 소리였다.

재호가 대답했다.

“보관함 주인을요.”

두 번째 호루라기 소리가 나기 전에, 해인은 새 빈칸을 만들었다.

삭제 완료 확인서. 9월 10일 오후 다섯 시. 수신자 서해인.

이번에는 빈칸이 창고보다 먼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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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 시각: 2026-08-21T21:58:51+09:00

MOBOT 세계관 변환 근거

- 운영 조직과 연구 조직을 분리한 로봇 사업 재편 보도: 이번 회차에서 외부 백업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삭제 명령을 누가 직접 받아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핵심 구조로 사용했다. - 공동주택 주차장에 장비를 투입해 데이터를 수집하려는 계획: 장비가 잠깐 작동했다는 사실을 넘어, 공동주택 생활 기록이 어디까지 이동했는지를 확인하는 압력으로 사용했다. - 합의 없는 현장 투입과 고용 안전장치에 대한 불확실한 탐색 기록: 확정되지 않은 고용 안전과 합의의 공백을 통해, 자료를 증거로 쓰는 방식이 작업자의 생계를 다시 압박하지 않도록 하는 장면에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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