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0

정각에 오지 않은 확인서

지산맨션에는 빈방이 없다

9월 10일 오후 4시 58분, 해인은 청명보안의 수신함을 새로고침했다.

메일함은 조용했다. 조용한 것은 대개 완료가 아니라 비밀번호 변경이었다.

재호는 관리실 벽시계 아래에 서서 장부를 펼쳤다. 전날 만든 칸은 한 줄이었다.

삭제 완료 확인서. 9월 10일 오후 다섯 시. 수신자 서해인.

그는 그 아래에 연필로 작은 칸을 하나 더 그었다. 도착 시각.

“두 분 전부터 빈칸을 늘리면,” 미경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말했다. “확인서가 도착할 자리가 줄어들어요.”

“도착한 문서가 앉을 자리는 남겨 둬야죠.”

“문서도 임대료를 내나요?” 수완이 물었다.

“요즘은 다 냅니다. 특히 늦게 오는 문서가 비쌉니다.”

해인은 휴대전화를 장부 옆에 놓았다. 오후 다섯 시까지는 아무에게도 먼저 전화하지 않기로 했다. 어제 청명보안 담당 한미수가 정한 시각이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먼저 독촉하면, 상대는 독촉받았다는 사실을 일정 변경의 사유로 바꾸는 재주가 있었다.

4시 59분. 복도등 하나가 먼저 켜졌다. 입구의 등이었다. 관리실 천장등은 아직 꺼져 있었다.

5시 정각.

메일 알림은 울리지 않았다.

해인은 바로 청명보안 대표번호를 눌렀다. 세 번의 연결음 뒤에 전날과 같은 밝은 음악이 흘렀다. 재호는 그 음악이 이번에는 축하 행사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틀어 놓은 것처럼 들렸다.

“청명보안 재해복구 운영팀입니다.”

“9월 10일 오후 다섯 시 발급 예정인 삭제 완료 확인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발급 여부와 현재 상태를 확인해 주세요.”

상담원은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해인은 기다리지 않고 덧붙였다.

“지금부터는 미발급 상태를 기록하겠습니다. 발급 예정이라는 말은 완료라는 말과 다릅니다.”

상담원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담당자 연결 후 정확히 안내드리겠습니다.”

5시 7분, 한미수가 연결됐다. 목소리는 전날보다 낮았고, 대기 음악은 여전히 밝았다.

“삭제 작업은 진행 중입니다.”

“완료됐습니까?”

“아직 확인 절차가 남아 있습니다.”

“확인 절차가 남은 겁니까, 삭제가 남은 겁니까?”

한미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재호는 그 침묵을 장부의 사실 칸에 적었다. 질문 후 11초 무응답.

“삭제 대상 묶음에 대한 검증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어떤 검증입니까?”

“보관 묶음 안에 복구 차단 상태와 운영 로그가 함께 있어서, 삭제 후 잔존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럼 어제 왜 완료 확인서를 오늘 다섯 시로 정했습니까?” 해인이 물었다.

“당시에는 작업 일정상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판단이 바뀐 시각은요?”

이번 침묵은 6초였다.

“오늘 오후 3시 40분경입니다.”

재호가 장부를 돌려 해인에게 보였다. 오후 3시 40분. 확인서 예정 시각보다 한 시간 이십 분 전이었다.

“그때 누구의 판단이 바뀌었습니까?”

“내부 처리 파트너의 작업 일정 조정이 있었습니다.”

해인의 손가락이 휴대전화 가장자리를 눌렀다.

“청명보안이 직접 삭제하지 않았습니까?”

“저희가 관리하는 외부 처리 파트너가 작업을 수행합니다.”

어제까지 청명보안은 보관 묶음의 주인이었다. 오늘은 작업을 맡긴 관리자가 되었다. 소유와 실행 사이에 작은 업체 하나가 들어왔고, 그 업체가 확인서보다 먼저 사라질 수도 있었다.

박성문에게 전화를 걸자 그는 두 번 만에 받았다.

“지금은 청명보안과 확인 중입니다.”

“청명보안은 하위 처리 파트너의 일정 조정이라고 말합니다.” 재호가 말했다. “서림주거관리도 그 파트너를 알고 있습니까?”

“계약상 외부 업체의 세부 운영은 청명보안 책임입니다.”

“그럼 어제 주민 대표에게 직접 삭제 확인을 약속한 주체도 청명보안입니다.”

“법무 검토를 거치지 않은 표현일 수 있습니다.”

해인이 전화를 넘겨받았다.

“박 팀장님, 어제는 회사가 주민 상대 대표 처리 책임자라고 서명했고, 오늘은 세부 운영을 모른다고 하시네요.”

“모른다는 게 아니라, 저희가 직접 관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어제 백업이 없다고 했다가 보관 묶음은 있다고 고친 말과 비슷하네요.”

박성문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료 삭제는 기술적 절차입니다. 일정이 조금 밀릴 수 있습니다.”

“조금의 기준을 문서로 주세요.”

“그건 청명보안에 요구하셔야 합니다.”

“요구하고 있어요. 그런데 주민협약의 서명자는 서림주거관리입니다. 둘 중 한 곳은 책임을 맡아야 합니다.”

박성문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재호는 이번 침묵을 적지 않았다. 이미 같은 칸에 한 번 들어간 사람의 침묵은 숫자로 줄어들지 않았다.

6시가 되기 전, 청명보안에서 파일 하나가 왔다. 제목은 삭제 작업 일정 변경 안내였다. 완료 예정은 다음 날 오전 11시. 사유는 보관 묶음 검증을 위한 처리 인력 재배치. 외부 처리 파트너의 이름은 비공개. 보관 근거는 기존 계약의 장애 분석 및 운영 개선 조항. 삭제 대상 목록은 첨부되지 않았다.

미경이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인력 재배치라면 사람을 옮긴 거예요, 돈을 옮긴 거예요?”

“둘 다일 수 있죠.” 수완이 말했다.

재호는 문서 하단을 가리켰다. ‘고객 서비스 연속성을 위한 비용 효율화 조치.’

그 문장은 보관 묶음보다 더 오래 남을 것 같았다. 작업을 줄이고, 사람을 옮기고, 고객에게는 연속성이라고 부르는 문장.

해인이 한미수에게 다시 전화했다.

“비용 효율화 조치가 삭제 지연의 원인입니까?”

“그 표현은 전체 운영 계획을 뜻합니다.”

“삭제 작업 인력이 줄었습니까?”

“개별 인력 정보는 제공할 수 없습니다.”

재호가 끼어들었다.

“그럼 이름은 가리고 작업자 또는 처리팀의 역할, 배정 시각, 시작·중단·재개 시각만 주세요. 사람을 증거로 넘기지 않고 작업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한미수는 처음으로 바로 대답했다.

“그 정도의 비식별 작업 기록은 검토해 보겠습니다.”

“검토가 아니라 발급 가능 여부와 시각을 정해 주세요.”

“내일 오전 10시까지 삭제 지연 사유서와 작업 기록 요약을 보내겠습니다.”

“삭제 완료 확인서는요?” 해인이 물었다.

“내일 오전 11시까지 발급하겠습니다.”

“조건이 붙었습니까?”

“검증이 완료된다는 전제입니다.”

해인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확인서가 또 조건부가 되기 전에, 그녀는 문장을 골랐다.

“주민 대표는 현재 문서를 삭제 완료로 수락하지 않습니다. 내일 10시 사유서와 작업 기록 요약, 11시 완료 확인서를 각각 받겠습니다. 셋 중 하나라도 빠지면 미발급으로 기록하고, 보관 근거와 지연 책임자를 다시 요구합니다.”

한미수는 말했다.

“그렇게 기록하셔도 됩니다.”

“기록하는 건 저희입니다. 허락은 필요 없어요.”

통화가 끝나자 박성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서림주거관리는 청명보안의 운영상 세부사항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해인은 그 문장을 한 번 읽고 재호에게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이제 이 사람은 대표가 아니라 벽이네요.”

“벽도 소유자가 있어요.”

“그 소유자가 없다고 하면요?”

“벽면 사용료를 물어야죠.”

미경이 계산기를 내려놓았다.

“누가 내요?”

“이번엔 회사들끼리 정산하게 둡시다.” 해인이 말했다. “주민 돈은 안 씁니다.”

그 말은 선택이었다. 청명보안의 추가 확인 비용이나 긴급 작업 비용을 주민 공동기금으로 먼저 내지 않는다. 삭제를 늦춘 쪽이 비용을 산정하고 부담하게 한다. 해인은 통화 끝에 그 조건도 넣었다. 주민 대표는 추가 작업비를 선지급하지 않으며, 비용 발생 근거와 부담 주체를 문서로 제시할 것.

그 순간 청명보안은 1만8천4백 원의 내용증명보다 큰 상대가 되었다. 해인의 이름으로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되었지만, 해인의 지갑으로 책임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저녁 7시 12분, 최경태가 관리실 앞에 왔다. 손에는 편의점 봉투가 들려 있었다.

“정기 점검 보류됐는데도 여기 와도 됩니까?”

“보류는 배정표에 있는 말이고, 방문은 본인 결정이죠.” 재호가 말했다.

최경태는 봉투에서 따뜻한 캔커피 세 개를 꺼냈다.

“작업자 이름을 달라고 하지는 마세요.”

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이름도요.”

“대신 작업자가 어떤 조건으로 호출되고, 몇 시에 멈췄는지는 물어보세요. 이름을 넘기면 그 사람도 다음 협박의 증거가 될 수 있으니까.”

재호는 장부에 ‘작업자 진술 없음’이라고 적으려다 멈췄다. 최경태는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할 권한과 위험의 경계를 정한 것이다.

그는 대신 청명보안 문서의 한 구절을 가리켰다.

“처리 인력 재배치라는 말, 현장에서는 보통 원래 하던 사람이 빠지고 다른 사람이 뒤늦게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새 사람이 들어오면 이전 사람이 어디까지 했는지 다시 확인해야 해서 더 늦어집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수완이 물었다.

“사람이 바뀌면 공구 위치부터 다시 찾거든요.”

캔커피가 식기 전에, 재호는 서울 회사에 보낼 메일을 작성했다. 원자료와 개인 식별 정보는 보내지 않음. 삭제 완료 미발급. 지연 사유와 비식별 작업 기록 요구 중. 본 건은 기존 문서 검수 대기 계약의 유급 범위에 포함되지 않음을 확인함.

그는 마지막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이번에는 자신이 무료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사건의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기로 했다. 다만 서울 회사에 추가 검수를 요청하지는 않았다. 답장이 오기 전까지 기다리면, 청명보안의 내일 오전 10시가 다시 남의 일정이 될 것이었다.

밤 8시 4분, 해인은 장부에 새 칸을 만들었다.

삭제 완료 확인서. 미발급. 지연 사유서·비식별 작업 기록. 9월 11일 오전 10시. 삭제 완료 확인서 재발급. 9월 11일 오전 11시. 추가 작업비 선지급. 주민협약상 거부. 책임 주체. 청명보안 및 서림주거관리 회신 대기.

도윤이 복도 끝에서 호루라기를 한 번 불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부르지 않았는데도 소리가 났다.

“왜 불었어요?” 해인이 물었다.

“사람이 안 오면 소리라도 와야죠.”

복도등이 하나씩 켜졌다. 입구, 계단, 2층, 3층. 관리실 천장등은 마지막까지 어두웠다.

재호는 청명보안의 일정 변경 안내를 장부 뒤에 끼웠다. 어제는 보관함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오늘은 존재하는 자료를 지웠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 더 어려웠다.

해인이 관리실 문고리를 잡았다.

“내일 열 시에 사유서가 오면요?”

“작업자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누가 어떤 조건에서 작업을 멈췄는지 확인하죠.”

“열한 시에 확인서가 오면요?”

“삭제 대상 목록과 대조하고, 완료라고 적힌 문장이 실제 삭제를 대신하지 못하게 합니다.”

“또 안 오면요?”

재호는 장부의 가장 아래 칸에 시간을 적었다. 오전 10시, 오전 11시. 두 개의 시각은 약속이 아니라 좁아진 통로였다.

“그때는 보관함 주인에게 지연을 설명하게 하는 게 아니라, 지연으로 이익을 얻은 사람과 작업을 떠안은 사람을 같은 자리에서 말하게 만들죠.”

해인은 문을 잠그지 않았다.

“관리실을 열어 둬요?”

“내일 오전까지는요.”

“자료가 또 들어오면요?”

“새 자료는 받지 말고, 받은 사실만 기록합시다.”

그들은 불을 켜 둔 채 밖으로 나왔다. 관리실 안의 벽시계는 8시 17분을 가리켰다. 복도등은 이미 모두 켜져 있었지만, 지산맨션의 밤은 아직 어두웠다.

삭제는 끝나지 않았다. 대신 누가 늦췄는지, 누가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의 이름을 증거로 쓰지 않을 것인지가 정해졌다.

해인은 내일의 두 시각 사이에 마지막 빈칸을 남겼다.

작업이 끝났다는 말이 아니라, 끝난 것을 확인한 사람.

이번에는 빈칸이 먼저 도착하지 않았다. 빈칸은 문이 열려 있는 관리실 안에서, 올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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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 시각: 2026-08-21T23:05:47+09:00

MOBOT 세계관 변환 근거

- 대형 제조사가 협력사에 높은 원가 절감을 요구했다는 소식: 삭제 예정 시각에 확인서가 오지 않은 이유를 단순한 기술 오류가 아니라 책임망 아래로 전가된 작업 비용 문제로 만드는 데 사용했다. - 대기업이 협력사와 인공지능·로봇 전환을 함께 추진한다는 협약: 삭제라는 한 번의 작업도 운영사·보관사·실제 작업자 사이에 분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데 사용했다. - 자동화 확대와 고용 협의가 충돌한다는 노사 갈등: 삭제 결과만 요구하면 다시 사람을 지우게 된다는 빈자리와, 작업자의 생계를 증거로 자동 이전하지 않는 최경태의 태도를 보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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